(중략)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부처님의 낙(樂)이 있으니, 견성대오(見性大悟)를 통해서만이 누릴 수 있는 적적삼매(寂寂三昧)의 낙이 바로 그것이로다. 이러한 선정삼매(禪定三昧)의 낙을 얻기 위해서는 금생(今生)에 깨달아 마쳐야겠다는 확고한 신심으로써 일체 모든 시비분별과 애착을 끊고,
“부모에게 이 몸 받기 전 어떤 것이 ‘참 나’던고?”
하는 이 화두를 들어 오매불망 간절히 참구하되, 흐르는 물이 근원이 마르기 전에는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흘러가듯 일상생활하는 그 가운데 챙기고 챙겨서 일념삼매(一念三昧)가 현전하도록 무한한 노력을 쏟아야 함이로다. 그리하여 참의심이 발동이 걸리면 일체처, 일체시, 일체경계에 바보가 되고 송장이 되어 흐르고 흐르다가 홀연히 보는 찰나, 듣는 찰나에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하게 되나니, 이로 인해 영원히 멸하지 않는 부처님의 적적삼매의 낙을 누리게 되리라. 이 공부는 “의심이 크면 깨달음도 크다”고 모든 도인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셨나니, 관법(觀法:비파사나)이나 염불선(念佛禪) 등의 다른 수행들은 그 힘이 미약하여 큰 깨달음을 이룰 수 없고, 설사 진리의 눈이 열린다 할지라도 법신(法身)의 진리나 여래선(如來禪)의 진리는 얻을 수 있을지언정 최고의 향상(向上)의 진리는 불가능함이로다. 오로지 일념삼매가 되어 화두의심이 삼천대천세계 온 우주에 가득 차서 일천 성인의 이마위의 일구(一句)를 투과(透過)할 때에 향상의 일구의 세계가 활짝 열리게 되고,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이 베풀어 놓은 백천 법문을 한 꼬챙이에 꿰어 대자유의 분(分)을 갖추게 됨이니, 이것을 일러 견성(見性)이라 함이로다.
산승의 스승이 되는 향곡(香谷) 선사께서도 봉암사 결사 당시 도반인 성철(性徹) 선사께서 던진 화두에 의심이 돈발하여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탑 난간에 기대어 비를 맞는 줄도 모르고 화두일념삼매에 드셨다, 그렇게 삼칠일간 모든 의식분별이 끊어져 온 몸이 등신이 되어 도량을 거닐다가 문득 흔들리는 자신의 손을 보고는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하셨으니, 이를 귀감삼아서 이러한 일념삼매가 현전(現前)하도록 무한한 노력을 쏟고 쏟을지어다.(중략)
<불교TV 법문>
(중략) 간화선(看話禪)의 특징이 활구참선이며, 활구참선의 생명력은 의심에 있음이로다. 제목과 의심이
같이 굴러가서 앉으나 서나, 가나 오나, 고요하나 시끄러우나 항상 화두가 흐르는 시냇물과 같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지속이 되어, 몰록 참의심이 돈발(頓發)할 것 같으면, 그 때에는 보는 것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며 나중에는 자기 몸뚱이까지도 다 잊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일념에 푸욱 빠져서 며칠, 몇 달이 흐르고 흐르다가 보는 찰나, 듣는 찰나에 화두가 타파가 되나니,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법이로다.
인신난득(人身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참으로 사람 몸 받기 어려움이요, 불법 만나기 어려움이로다. 왜 어려우냐? 중생은 지혜를 밝히는 일을 등지고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이로다. 즉 탐ㆍ진ㆍ치(貪瞋癡),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여기에 찌들어 ‘참 나’가 있음을 상실하고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사람 몸 받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고 날 적마다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지혜를 밝히는 이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됨이로다. 부처님과 같은, 도인과 같은 지혜를 밝히지 않고는 세세생생 나고 날 적마다 만인이 우러러보는 복락을 누릴 수가 없음이로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 참선을 해야 되나니 사구(死句)가 아닌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여야 함이로다. 그런데 요즘 들어 참선을 가지각색으로 지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도다. 혹자는 염불선(念佛禪)으로 지도를 하고, 혹자는 상대의 물건ㆍ대상을 관하는 관법(觀法)으로 지도를 하고, 혹자는 묵묵히 돌이켜 보는 묵조선(?照禪)으로 지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도 일종의 수행의 방편이나 많은 생(生)을 지내야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할 수 있으니, 간화선(看話禪)과는 큰 차이가 있음이로다. 간화선은 바르게 참구하여 의심이 온 천지에 차는 화두일념삼매(話頭一念三昧)만 도래한다면 천사람 만사람이 모두 도(道)가 열리는 법이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로다.
그러니 다른 수행법보다도 활구참선을 함으로써 여러 생에 걸려 이룰 성불을 금생에 다해 마칠 수가 있음이니, 이를 잘 받아들여 간절히 참구할지어다. (중략) <백양사 1차 무차선대법회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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