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사렛’(Nazareth)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뜻의 ‘나실인’(nazirite)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 때문일 것이다. 나사렛은 예수의 고향 ‘땅’을 일컫는 이름이지만 동시에 예수의 ‘본질’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하다.?---「어둠이 지극할 때」중에서
마귀와 제휴한 권력은 반드시 백성을 억압하지 않던가. 변하지 않는 세상에 절망한 사람일수록 권력에의 충동에 빠지기 쉽다. 예수는 권력을 통해 세상을 급진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신다. 진정한 변화는 힘이 아니라 섬김과 사랑을 통해 서서히 일어난다. ---「시험을 받으시다」중에서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는 따름이 불가능하다. 손에 잡은 것을 놓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붙잡을 수 없다. ‘말’(末)을 버리고 ‘본’(本)을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제자들을 부르시다」중에서
세상 사람들은 국적, 인종, 피부색, 문화, 성별, 빈부, 귀천 등의 척도를 가지고 온통 가르고 나누지만, 하나님 안에서 세상은 둘이 아니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소속이 아니라 삶이다. ---「복이 있는 사람들」중에서
신앙생활이란 들음과 행함, 아는 것과 살아 내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어야 한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앎은, 특히 종교적 앎은 교만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는 행함이 없는 신앙생활의 허망함을 종말론적인 심판의 이미지를 통해 보여 주신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칠 때 그 무너짐이 심하리라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중에서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삶으로 나아감이지, 한가로운 산보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 길은 좁은 길이 아니던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중에서
여전히 부자 청년에게 마음이 가 있던 제자들은 마치 꿈을 꾸듯이 묻는다. 예수는 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것에서부터 구원이 시작된다고 대답하신다.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현세적 가치에 대한 집착을 자꾸만 내려놓는 것이다. ---「신뢰의 모험」중에서
예수가 분노하신 것은 성전에서 벌어지는 상행위 자체가 아니었다.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제물을 공급한다는 미명 아래 제사장들과 상인들 사이에 맺어진 탐욕의 카르텔에 분노하신 것이다. 제도화된 종교와 종교인들은 넉넉한 물질이 주는 안락함과 특권에 길들여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질을 포기하게 된다. 성전보다 중요한 것이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아, 예루살렘」중에서
괜히 허둥거리면서 일상의 삶을 소홀히 하지 말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환난 예고」중에서
기다리는 이들은 기다림의 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막연히 그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진정한 기다림이 아니다. 기다림의 내용을 선취하기 위해 노력할 때 기다림은 진실한 것이 된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영원의 빛 속에서 재구성할 때 삶은 아름다워진다.---「슬기로운 처녀들」중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선포하고 확장하는 일이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보다는 차라리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편이 낫다. 예수는 우리가 넘어진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중에서
예수는 고통받는 이들을 ‘내 형제’라 부르신다. 진실한 믿음은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을 어루만지고 일으켜 세우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믿음의 진실성은 약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양과 염소, 가름의 기준」중에서
세상 통치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으신 예수는 그 권한을 제자들에게 재차 위임하신다. 그 위임의 내용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진 않아도 주님은 지금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다. '함께하시는 주님', 임마누엘. 우리 삶의 희망은 여기서 움터 나온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으리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