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징어의 눈은 인간의 눈과 아주 비슷하다. 그러나 이것은 진화생물학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가운데 하나인 수렴일 뿐이다. 서로 다른 동물문에서 독립적으로 진화해온 비슷한 기관이, 서로 비슷한 기본 건축재료를 이용해서 똑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한 동물의 문을 결정하는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부구조라고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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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장기, 배아에서 성체로 발달하는 방식, 외부형태 등은 그 동물의 유전자, 곧 세포 내의 염색체가 운반하는 명령어에 따라 결정된다. 수많은 유전자들이 내부구조와 그 발달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한 동물의 외부형태를 결정하는 유전자의 수는 대체로 그에 비해 매우 적다. 그렇다면 유전자 자체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수렴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렴은 내부구조가 서로 다른 동물들끼리 비슷한 외부형태를 띠는 것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동물의 외부란 외피의 재료, 색, 모양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내부구조보다는 사실 환경과 더 밀접한 연관이 있다. 환경에는 기온과 빛 조건 같은 물리적 요인과 동물 이웃들 같은 생물학적 요인이 포함된다. 특히 한 동물의 외피는 그것이 속한 특정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데, 내부 몸 설계에 따라 이미 정해진 커다란 범위 안에서 외피를 환경에 맞게 바꿀 수 있다. 만약 같은 유형의 환경에 사는 두 동물이 있다고 했을 때, 두 동물은 내부구조에 상관없이 서로 비슷한 외피를 지닐 수도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외피를 결정하는 유전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고, 이 유전자들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서로 다른 종끼리 똑같은 구조를 암호로 정하게 될 확률이 아주 적지는 않기 때문이다. (……)
내부구조는 훨씬 더 많은 유전자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새로운 내부설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모든 유전자가 동시에 돌연변이를 일으켜야 한다. 내부설계는 외피와는 달라서, 대개 변화의 중간단계에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서히 만들어질 수가 없다. 이것이 내부설계를 통제하는 메커니즘과 외피를 통제하는 메커니즘의 커다란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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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Charles Darwin과 앨프레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는 진화, 곧 가지를 뻗어나가는 영속적인 과정이 동물다양성을 창조해낸 장치임을 처음 깨달았던 사람들이다. 물리적?생물학적 환경 내의 변이는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각각의 종들 또한 최상의 설계(또는 가능한 한 최상에 가깝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변해야 한다. 이것이 적응이다. 그러므로 환경 내의 변이는 그 지역의 동물들에게는 변화해야 한다는 압력이라고 볼 수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그래서 ‘선택압력’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사소한 선택압력은 그 지역 동물의 작은 변이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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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시대 이후 진화론은 여러 차례의 대변혁을 거쳐왔다. 지구 생명의 역사는 주로 오랜 시기에 걸쳐 일어난 점진적인 진화(‘소진화’)들로, 심지어는 완전한 정체상태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시기들이 갑자기 막을 내린 때들이 있었으니, 소진화가 ‘대진화’로 대체되었던 시기가 그때였다. 대진화란 짧지만 폭발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났던 진화활동으로, 오랫동안 유지되던 소진화의 시기는 대진화에 의해 단속적으로 붕괴되어왔다. 따라서 진화사에서는 이런 모델을 ‘단속평형’이라고 한다.
--- p.30-31
캄브리아기 폭발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들은 ‘모든 동물문의 갑작스러운 진화’라는 정의로 매우 단순화되어 있었다. 생명의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극적인 사건에 대한 이런 식의 경솔한 접근법은 지극히 잘못된 오해를 일으킬뿐더러, 그동안 그 사건의 원인에 대해 잘못된 설명을 숱하게 낳곤 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동물의 내부설계와 외부가 뭉뚱그려져 취급되어왔다는 것, 그래서 그것들의 진화가 동시적으로 일어났다고 여겨져왔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캄브리아기 폭발은 전적으로 몸의 바깥부분에만 한정된다.
--- p.32-33
다윈은 눈을 일컬어 ‘지극히 완벽하고 복잡한 기관’이라고 했다. 눈이라는 말은 빛을 이용해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시각 이미지를 만드는 기관을 가리킨다. 극도의 완벽성과 복잡함은 더욱 효율적인 눈에 나타나는 특성이며, 눈이 매우 값비싼 부품이라는 건 아주 적확한 표현이다. 그러나 본다는 행위의 전체공연에서 눈 자체는 제1막에 불과하다. 제2막은 전선으로 전기를 보내듯, 시각정보를 눈에서 두뇌로 보내는 과정이다. 제3막은 두뇌 속에서 상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결국 시각은 보는 동물의 눈과 두뇌, 둘 다 있어야 성립한다.
--- p.256
초보적인 수용기들은 상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에 눈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이다. 눈은 광감각세포들이 복잡해지고 눈 안쪽에 안감처럼,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얇은 판인 ‘망막’이 만들어졌을 때 비로소 탄생한다. 망막은 그 위에 무엇이 투사되든 정확히 감지하므로, 어떤 추가장치를 이용해서 애초에 망막에 또렷하게 상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고감도 필름을 끼운 카메라라고 해도 렌즈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이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우리는 눈을 갖게 된다. 곧, ‘보는’ 것이 가능한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밟아온 발걸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 p.259
실제로 삼엽충의 눈 주변에는 다른 감각기관들이 있었으므로, 최초의 광감지기들은 이런 기관에서 신경을 빌려왔을 것이다.
우리는 겹눈이 진화할 시간은 단 100만 년이면 충분하다고 결론지음으로써 불안감을 가라앉힐 수 있다. 적어도 우리의 화석증거와 일치시키는 데에는 그 시간이면 적당해 보인다. 우리의 요구는 이제 충족된 것 같다. 100만 년은 눈이 진화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인 것이다. 우리는 드디어 5억 4,400만 년 전, 캄브리아기 삼엽충들의 조상 속에서 감광세포들의 판이 뚜렷해진 시기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또한 5억 4,300만 년 전, 캄브리아기 경계선 반대쪽에서 삼엽충이 자랑스레 눈을 부릅떴던 시기의 그림도 그릴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그림 사이에서 감광판이 눈으로 진화했다.
5억 4,400만 년 전과 5억 4,300만 년 전 사이에 한 가지 진화가 일어났다. 이 100만 년이란 기간에 시각이 탄생한 것이다.
---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