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글쎄, 그거 꿈같은 얘기 아닌가? 양쪽에서 서로 반목을 조장해 대면서 그 위기를 독재 강화에 써먹고 있으니 분단은 갈수록 견고해질 수 밖에 없잖아. 한 가지 좋은 예가 있어. 거 김신조 부대 사건 있잖아?
그 사건이 터지자 이쪽에서는 김일성이 곧 쳐내려올 것처럼 난리 법석을 떨며 250만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어. 그걸 보고 저쪽에서는 가만히 있었겠어? 그랬을리가 없지. 보나마나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 괴뢰도당들이 북침 준비를 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독재 강화의 호기로 삼았겠지.
--- p.109
셋방이 서른 개가 넘는 '벌집'은 오가는 사람 없이 조용했다. 방마다 공원들이 세 들어 있어서 낮에는 언제나 빈집이 되었다. 그 빈집의 대문은 늘 열려 있는데도 도둑이 드는 일이라곤 없었다. 방마다 채워져 있는 자물쇠가 위력을 발휘해서가 아니었다. 공원들의 방에 들어가 봤자 헛수고라는 걸 도둑들이 먼저 알았다. 미자는 공동수도가 있는 시멘트 깔린 좁은 마당을 가로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복실이를 생각하며 자기네 방으로 고개를 돌렸던 것인데 눈에 들어온 것은 벌집 전체의 모습이었다. 빨간 벽돌의 3층집, 그건 이제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소름이 끼쳤다. 그건 집이 아니라 감옥이고 지옥이었다. 거기서 벗어날 가망이 없어질수록 감옥이고 지옥 같은 생각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둘이 살기에도 편치 않게 좁은 방에 대개 넷씩이 비좁게 살아야 했다. 보증금 20만 원에 2만 원 월세를 둘이 감당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 집에 120여 명이 들끓었다. 그런데도 변소는 남·여 하나씩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도도 마당에 하나뿐이었다. 아침마다 변소 앞에서, 수도를 에워싸고 벌어지는 소란이란 사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런 벌집들이 구로공단 주변에는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중략)
미자는 성질나는 대로 하자면 당장 돈을 꺼내 그 여자의 얼굴에 내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복실이의 몸조리가 먼저였고, 방세에 대해 서로 의논해야 했다. 방세가 밀린 것은 복실이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복실이처럼 앞장서 나서지 못한 대신 수술비는 셋이서 힘을 합해 도와야 했다. 복실이가 그렇게 당한 것은 혼자 잘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모두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미자는 대문으로 들어서며 또 한숨을 쉬었다. 복실이의 취직이 큰 걱정이었다. 회사에서는 복실이를 쫓아낸 것만이 아니라 이름까지 그 무시무시한 블랙리스트에 올려버렸다. 그래서 복실이는 큰 공장에 취직을 못하고 월급이 절반 가깝게 줄어버린 구멍가게 공장에 임시로 발을 걸고 있었다. 복실이 말로는 야학에서 어떻게 해서 곧 큰 공장에 취직하게 될 거라고 했지만, 그게 어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복실이가 장해 보이기도 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영 종잡기 어려웠다.
--- pp.16~19
'박정희. 그사람 대통령을 하기 전까지의 생애도 한마디로 하기 어렵게 복잡한데. 대통령을 한 동안의 공과도 한마디로 하기 어렵게 복잡해요. 그런데 잘못한 것 중에서 유신독재 다음으로 꼽혀야 하는 게 바로 그 지방색을 뿌리깊게 박은 지역 차별주의지요. 그것도 독재체제를 유지해 나가기 위한 한 방편으로 필연적인 산물인데, 어쨌든 그건 박 통이 크게 잘못한 거고, 나라 꼴을 위해서도 하루빨리 일소시키지 않으면 안돼요.'
--- p.305
뭐 구분하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 나라 모든 분야는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는 답입니다. 이 한가지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 우리나라 양쪽 끝인 두만강변에서 제주도 까지 일제시대에 있었던 일본인들은 조선 총독부터 숯장사까지 다 합쳐서 80만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빌붙었던 친일파들은 150만명을 넘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단 한명도 처벌받지 않고 고스란히 기득권을 누리며 살고 있는 곳이 이 대한민국입니다.
--- p.187
그런 소리 말어. GNP를 박정희 혼자서 다 올린 것처럼. 정치가 산으로 기어올라 가거나 바다로 빠져 들어가거나 간에 국민들은 그저 잘살아 보려고 죽자사자 일하고 있으니까. 언제라고 개판 정치 덕에 GNP올랐나. 제길.
--- p.216
"어머나! 이를 어째. 나라 망했네."
박 대통령이 시해되었다는 텔레비전 보도를 보는 순간 한정임이 소파에 주저앉으며 터뜨린 말이다.
"어! 어! 이게 무슨 소리야."
양용석은 이 말밖에 못하면서, '나라 망했다'는 아내의 말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슬픈 조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되풀이되고 있는 보도를 들으며 한정임은 울었다. 양용석은 무언가 복잡하게 뒤엉킨 마음으로 담배만 피웠다.
양용석은 사무실에서도 하루 종일 뒤숭숭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보내다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사업상 술 마실 선약이 있었지만 서로 다음으로 미루었다.
"어차피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이젠 세상이 바뀌었어요."
식탁에 앉은 한정임이 말했다. 그녀의 기색에서는 아침에 울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양용석은 아내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최혜경, 그것 이젠 팔다리 다 잘렸어요."
한정임이 싸늘하고 매섭게 말했다. 그 눈초리며 얼굴에서도 섬뜩한 냉기가 뻗치고 있었다.
"글쎄……, 그럴까? 도로 그 사람들이 잡을 텐데."
자신이 하루 종일 생각해 온 문제라서 양용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아요, 공화당에서 잡겠지요. 그치만 최혜경네는 끝장났어요. 그 남편이 다른 사람들한테 억시게 미움 산 것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 사람은 각하 없으면 시체예요."
한정임은 정신차리라는 듯 남편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당신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래도 속단할 수는 없어. 그 사람도 만만하지는 않으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돈까지 많이 몰아잡고 있으니까 권력 안 잃을려고 온갖 짓 다하며 발버둥을 치겠지요. 그치만 이젠 한풀 꺾인 건 틀림없어요."
"그야 그렇지"
"흥, 천 년 만 년 갈 줄 알았겠지만 이렇게 당하는 수가 있다구요, 아유 그 배신자, 속이 다 시원해."
--- pp.217~218
"어머나! 이를 어째. 나라 망했네."
박 대통령이 시해되었다는 텔레비전 보도를 보는 순간 한정임이 소파에 주저앉으며 터뜨린 말이다.
"어! 어! 이게 무슨 소리야."
양용석은 이 말밖에 못하면서, '나라 망했다'는 아내의 말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슬픈 조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되풀이되고 있는 보도를 들으며 한정임은 울었다. 양용석은 무언가 복잡하게 뒤엉킨 마음으로 담배만 피웠다.
양용석은 사무실에서도 하루 종일 뒤숭숭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보내다가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사업상 술 마실 선약이 있었지만 서로 다음으로 미루었다.
"어차피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이고, 이젠 세상이 바뀌었어요."
식탁에 앉은 한정임이 말했다. 그녀의 기색에서는 아침에 울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양용석은 아내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최혜경, 그것 이젠 팔다리 다 잘렸어요."
한정임이 싸늘하고 매섭게 말했다. 그 눈초리며 얼굴에서도 섬뜩한 냉기가 뻗치고 있었다.
"글쎄……, 그럴까? 도로 그 사람들이 잡을 텐데."
자신이 하루 종일 생각해 온 문제라서 양용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아요, 공화당에서 잡겠지요. 그치만 최혜경네는 끝장났어요. 그 남편이 다른 사람들한테 억시게 미움 산 것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 사람은 각하 없으면 시체예요."
한정임은 정신차리라는 듯 남편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당신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래도 속단할 수는 없어. 그 사람도 만만하지는 않으니까."
"물론 그렇겠지요. 돈까지 많이 몰아잡고 있으니까 권력 안 잃을려고 온갖 짓 다하며 발버둥을 치겠지요. 그치만 이젠 한풀 꺾인 건 틀림없어요."
"그야 그렇지"
"흥, 천 년 만 년 갈 줄 알았겠지만 이렇게 당하는 수가 있다구요, 아유 그 배신자, 속이 다 시원해."
--- pp.217~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