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문명들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수학 이야기들…, 이런 책이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은 이전에 이런 책이 없었기 때문에 쓰여졌다. 나는 알기 쉽게 수학의 역사를 보여주는 방법이 무엇일까 오랫동안 고민했다. '위대한 정리들'을 순서대로 독자 앞에 내어놓기보다는 수학이란 것이 각 시대 및 문명의 관심사와 얼마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지 펼쳐놓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자면 시각적인 자료와 수학자들의 말을 수학 개념 발달사와 함께 엮어놓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면 제약상 수학의 전체 역사를 다룰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위대한 문명들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수학 이야기들을 골라 담았다.
태초부터 수학은 인간의 모든 행동에서 분명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교역, 농경, 종교, 전쟁 등을 통틀어 수학의 영향을 받고 또다시 수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다. 그럼에도 그 역사의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인류 역사에서는 과학, 철학, 수학의 진화가 위대한 통치자나 피비린내 나는 전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앞으로의 역사 연구가 균형을 잡는데 이 책이 미약하나마 공헌하게 되기를 바란다.
어쩌면 과학은, 특히 그중에서도 수학은 예술에 비해 대중에게 보다 덜 친숙하고 그리하여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인공 지능 등의 용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게 된 것을 보면 이제 조금씩 그런 대중화가 이루어지는 듯 하다. 이전까지는 수학자가 수학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아득한 상아탑 위의 선문답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바야흐로 수학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게 되었다.
수학은 요령부득인 기호의 학문이 아니다. 수학은 개념의 학문이다. 공간, 시간, 수, 관계 등에 대한 개념 말이다. 수학은 양적 관계에 대한 학문이며 그 발전의 역사는 인간의 지적 욕구를 거울처럼 반영한다. 모든 개념은 통찰력으로부터 생겨난다. 계산 기법이 발전하면서 수학은 시각적 학문으로 다시 태어났다. 혼돈 이론이나 복잡계 등이 보여주는 멋진 구조는 복잡한 성질들을 다 걷어내 버린 아름다운 수학의 풍경이다. 수학적 정밀함과 예술적 감각을 결합한 새로운 미학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결합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서로 관련되어 있었지만 그 관계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던 두 개의 문화를 보여주는데 말이다.
■ 나는 지금 행복하다. 이 한 권의 책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경직된 생각을 바꾸고 싶었다. 그 경직된 생각이란 바로 '수학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라는 등식이다. 수학 이야기를 꺼내 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경험담의 99퍼센트는 '학교 다닐 때 난 수학을 엄청 못했었어.'라는 말이었다. 쑥스러운 듯, 하지만 동시에 당연한 일 아니겠냐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1995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무슨 모임에 참석해 수학자라고 나를 소개하면 프랙털이나, 혼돈 이론 등을 주제로 한 토론이 길게 이어지는 일이 종종 생겨났던 것이다. 90년대 말엽이 되자 주요 화제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이에 대해 전혀 들어본 바가 없다면 당장 이 책을 사야 한다)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수학을 그저 학창 시절과 연관시킬 뿐인 사람이 적지 않다.
수학 하면 학교가 떠오른다는 것은 그럭저럭 참아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로지 그것뿐이라는 사실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를 만들어낸 힘, 인간 지성 활동의 주된 흐름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오싹할 정도로 무지하다는 현실과 어떻게 싸워 나아가야 할까?
당장 뭘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 수준은 서서히 높아지고 있고 수학을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인간 활동으로 인정하는 경향도 확산되는 중이다. 언론 매체에서도 수학의 발전이나 그 응용에 대해 자주 보고하게 되었다. 수학 관련 서적이나 잡지를 즐겨 읽는 아마추어 전문가들도 늘어났다. 수학 관련서는 비소설 분야 베스트셀러에서 수위를 다툰다. 수학 관련 영화가 상을 받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빚어진 것일까? 국제적인 단체나 정부가 주도한 것은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2000년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수학의 해이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반응은 여전히 '수학 학교'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수학은 멋진 것, 수학은 새로운 로큰롤'이라는 말이 신문 지상에 등장하기는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노력한 결과였다. 하지만 전체를 위한 협력은 없었다. 그저 각 개인이 나름대로 수학의 한 측면만을 일반 대중에게 소개하고 싶어했을 뿐이다.
수학이 과학 기술 분야의 선봉장이며 기술 발전의 중심적인 힘이고 인류 문화 발전의 주역이라는 데 대해 이제 조금씩 합의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사실 수학은 늘 그러한 존재였다. 다만 사람들이 이제야 그것을 깨닫는 것에 불과하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만키에비츠는 이 외로운 투쟁을 펼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나는 네덜란드 화가 모리츠 에셔의 전시회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모리츠 에셔는 수학자가 아니지만 그의 초현실적 예술 세계를 지배한 타일 문양, 비유클리드 기하학, 순수 수학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이고 시각적인 흉내 등은 모두 수학적인 주제들이다.
리처드 만키에비츠는 그 전시회 개최와 무슨 관련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수년 동안 수학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과감한 시도를 계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시도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 《문명과 수학》이다. 그는 '이전에 이런 책이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을 썼다고 감히 외치고 있다!
자, 이제는 이런 책이 존재한다. 수학은 학창 시절 배웠다가 어른이 되면서 바로 잊어버리는 산수 공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수학은 최소한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학문이며 인류 문화 흐름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수학은 그 5000년 동안 그저 영향력을 유지했을 뿐인 예술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 문화는 바로 그 수학이라는 직접적인 바탕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수학은 재능을 타고난 비교적 소수의 인물들이 그때까지 존재하던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양 제거해 버리고 함께 경이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 협력 작업이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는 수학에 대한 책을 찾으면서 공공 도서관에서 오랜 기간을 보냈다. 어린놈이 엉뚱한 짓을 한다고 꾸짖는 어른은 주변에 없었다. 설령 그런 어른이 있었다 해도 상관하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이미 수학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당시 내가 읽을 만한 책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지금 이 책처럼 수학적 사고와 여타 인간 행동 사이의 상호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수학은 우리에게 지도 제작법, 항해술, 예술 화법, 라디오 텔레비전, 전화기 등을 가져다 주었다. 수학이 없었다면 비행기 운항은 지금처럼 효율적이지 못했을 것이고 위성 텔레비전 채널 수는 기껏해야 10여 개에 불과했을 것이며 오늘날의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 생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수학 혼자 그런 일을 다 해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핵심적인 부분을 담당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 그 일들이 전부 다 훌륭했다고 말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 엄청난 영향력에 대해선 누구든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 이 책의 주제인 수학은 인류 역사라는 양탄자에서 제일 길고 화려한 실오라기이며 인류의 성장과 가장 밀접하게 엮어져 있다. 《문명과 수학》에서 우리는 명료한 설명과 인상적인 그림, 사진을 통해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10대일 때 이런 책을 만나볼 수 있었다면 난 정말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역시 행복하다. 이 책은 어른과 아이,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짜' 문화를 이해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