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정상은 평균이나 전형적인 것을 가리킨다. “평균”은 범위 내에 속하여 대략 50%의 인구가 지적 혹은 학문적 능력, 또는 신체 성장에 대한 표준화 점수를 의미한다. 그러나 세상은 점수가 상대적으로 평균 범위를 밑도는 다른 50%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요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죄로 인한 비정상적인 세상에서 오히려 다양성과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은 전형적이거나 “정상”이라는 것이다. 단지 평균 능력, 평균 성취, 평균 신장이나 체중, 평균 외모, 혹은 심지어 평균 나이에 속하는 사람들을 정상이라고 기술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인위적이며 비현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는 각기 고유의 장점들과 약점들을 소유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 독특하게 지음받았기 때문에, 정상은 무의미한 개념이 된다. --- p.40
삼위일체 하나님은 상호의존에 대한 모범을 제공한다. 세 분의 독특한 위격들이시지만, 완전히 연합이 되신다. 다양성 속에서 똑같은 연합은 공동체로서 교회에 대한 신약성경의 기술에서 보인다(“코이노니아”: 친교, 동역, 연합). 즉, 다른 국가, 인종 그리고 사회경제적 배경으로부터 온 신자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한 가족이 된 것이다. 교회 내 다양한 은사들에 대한(영적이든 그렇지 않든) 바울의 가르침은 여전히 아직까지는 상호연결되고 의존적인 하나의 몸을 형성해 가고 있지만 다양성 안에서 통일의 이미지를 완성한다. 몸의 각 지체는 다른 은사들을 받았지만, 그들은 몸의 “하나됨” 안에서 기능해야 한다(롬 12:5; 고전 12:7; 엡 4:12). 서로 간에 대한 우리의 의존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상호의존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정의의 중심”(Petersen, 1993, p. 34)에 있다. --- p.128
울펜스버거는 장애당사자와 가족들이 종종 경험하는 “상처들”을 말한다. 그가 제시한 처음 두 가지 상처들은 신체적이거나 지적 손상 그 자체이며 상처들을 낳는 기능적 한계들이다. 물론 여기서 상처들이란 장애당사자 안에 놓여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울펜스버거가 지적했던 남은 상처들은 장애당사자 밖에 있으며 직접적으로 비장애인들의 태도와 반응과 관계한다. 이러한 상처들은 네 가지 목록들로 묶을 수 있다. 그것들은 타인에 의해 결정된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가치와 관계한 상처들, 거절과 분리로 인한 상처, 개인적인 관계들, 자유 그리고 지역사회와 관계한 상처들, 물질적이고 경험적 상처들이다. --- p..167
특별히 출산과 영적 거듭남(하나님의 재창조적 사역)과 같은 기적들은 아직까지 일어난다. 하나님은 아직도 특별한(기적적인) 개입과 인간의 수단(의사, 약)을 사용하심으로 육체적 치료를 일어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자신의 교회를 사용하여 치유를 가져오는 것이다(회복, 화해, 관계). 우리는 장애의 육체적 측면의 치료가 가장 필요한 바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장애의 한계 없이 살아가는 것은 더없이 바랄 것이지만,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고립과 소외는 더 큰 문제이다. 그것은 치유가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 모두의 심령과 태도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문제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치유가 가장 필요하다는 점에 있다. --- p.193
비록 사람들은 장애인이 되고 장애자녀를 낳는 것과 관련하여 “왜?”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지만, 궁극적인 답변은 얻지 못한다. 하나님은 욥에게 왜 그가 고난을 겪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주와 만유의 주재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상기시켰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지식에 의지하고 그의 사랑과 지혜를 신뢰해야 한다.
과도하게 신정론에 관한 문제들에 집중하는 것은 장애의 원인이 되거나 혹은 장애인의 영적이고 사회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데 역할을 하는 사회적 요소들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 가난, 영양실조, 기본적 의료 돌봄을 사용할 수 없음,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부정 등과 같이 장애와 종종 상관하는 사회적 요소들은 개인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로서 다룰 수 있고 다뤄야만 하는 것들이다.
---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