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지역 백두대간의 고갯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나라 백두대간 고갯길의 개괄적인 특성을 살펴보는게 순서이겠다. 우리나라의 백두대간 고갯길은 그 특성상 크게 네 종류로 나뉜다. 첫번째는 관서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북한 지역의 고개이고, 두번째는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을 연결하는 강원도 지역의 고개이며, 세번째는 기호지방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고개, 마지막으로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고개 등이다.
관서와 관북의 기준점인 철령 이북에 걸린 북한 지역의 고개들 가운데 압록강 유역과 동한만을 연결하는 것으로는 황초령이나 부전령이 그 대표적인 고개이며, 대동강 유역과 동한만을 연결하는 고개로는 검산령과 거차령 등이 있다. 그리고 임진강유역에서 동한만으로 넘어가는 고개로는 마식령과 추가령이 유명하다.
영서 지역과 영동 지역을 연결하는 강원도 지역 고개들의 중심은 오로지 대관령이다. 대관령을 기준으로 여서와 영동의 경계가 설정됨은 물론, 관동이란 명칭도 그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권역의 고개들을 한 발 더 세분하자면 북한강 유역에서 영동 지역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남한강 유역에서 영동 지역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나눌 수 있다. 오대산을 경계로 한계령ㆍ진부령 같은 고개들이 전자에 속하고, 대관령ㆍ백복령 같은 고개들이 후자에 속한다.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고개들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경 지역의 고개를 비롯하여 경북 북부 지역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고개 내지는 경북 서북부 지역에서 충북으로 넘어가는 고개들이 두루 포함된다. 유역으로 정리하자면 낙동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낙동강 유역에서 금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나뉘는데, 죽령과 문경 지역의 고개들이 전자에 속하고, 추풍령과 화령 같은 고개들이 후자에 속한다.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고개는 민주지산의 삼도봉을 기점으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에 걸린 고개들을 가리킨다. 이 권역의 고개들은 세분하여 금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고개와 섬진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고개로 나뉜다. 전자는 육십령이 그 대표적인 고개이고, 후자는 여원재가 그 대표적인 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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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낙방하고 다시 새재를 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영남 유생들의 심정, 그것을 엿볼 수 있는 몇몇 단서가 있다. 안동 출신의 유우잠은 새재 마루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 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유우잠은 해마다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지만 끝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따라서 유우잠은 아들 유직이 인조 8년(1630)에 실시된 생원진사시에서 진사로 입격하게 되자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이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이황의 손자인 이봉원이 과거에 낙방하자, 이황의 제자이자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학봉 김성일이 이봉원을 전송하면서 그를 위로하던 글도 남아 있다. “십 년 동안 남은 힘에 과거시험 공부했고, 가정에서 시례 배워 견문도 많았다네.……즐거이 고향 가서 하던 공부 다시 하고, 궁달로 마음에 누 끼치지 말지어다.” 이봉원에게 있어서 선배이자 스승격이던 김성일이 써준 이 시가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봉원은 이 시를 가슴속에 품고 새재를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봉원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함으로써 김성일의 위로는 이봉원에게 평생의 위로로 남게 되었다.
조선 후기, 특히 우리가 세도정치라고 부르는 시기에 영남 유생들의 과거에 대한 인식, 낙방 이후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저상일월』의주인공 박득령이다. 그는 당시 예천의 천석꾼 지주 집안이었으며, 그는 물론 그의 형도 과거시험을 거의 해마다 부지런히 보러 다니는 전형적인 유생 집안이었다. 박득령은 친림시에도 응시하기 위해 열심히 한양으로 올라갔지만, 과거에 급제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결과에 대해서는 '아니다 다를까'의 반응을 보였다. 식년시와 증광시의 복시를 치르기 위해서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올라갈 때에는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역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박득령은 급제하지 못했지만, 영남의 유생들이 급제자 중 많은 수를 차지하게 되자 자신에게도 급제할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서 귀향길에 오르는 모습을 보인다.
박득령이 한양에서 과거를 치그고, 낙방한 이후 귀향하는 과정은 오랜 기간 과거길을 떠났던 과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839년 9월에 치른 과거시험에 대한 그의 일기를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다. 한양에 도착하면 일단 여관을 정하게 되는데, 박득령은 이 여관에서 자신이 맡았던 친구의 노자까지 도둑을 맡게된다. 여기에서 그는 고발 한번 해보지 못하고 “인심이 이러하니 매우 두렵다”는 표현을 남긴다. 그는 또한 고향에서는 소문으로만 듣던 천주교도의 목을 치는 현장을 확인한다. 한양의 인심, 정치적 ㆍ사상적 변화 양상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몸서리를 치며 절감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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