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종 황제라고 하면 중국 미술의 공로자, 특히 화화의 황금 시대를 구축한 중심 인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높은 산 정상 가까이 소나무 겨우살이가 완만하게 옆으로 휘어진 고목으 바위 밑동에 한 고사가 비스듬히 기대어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그 시선이 미치는 곳에는 투명한 가을 하늘 속에 두 마리의 학이 유유히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날고 있다. 쿄토 난젠지 콘치인에 소장되어 있으며, 무로마치 막부 제3대 장국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소장품이라고 알려진 휘종 황제가 그린 이「추경산수도」를 접하면, 마치 자신이 그림 속의 고사가 되어 학과 함께 맑고 투명한 창공을 날고 있는 심경이 되어버린다. 동양 회화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는 고아한 심경을 한 폭의 그림 속에 담으려 온힘을 다하고 그것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재능과 높은 교양, 간단히 말해 문화의 축적이 요구될 것이다.
각설하고, 휘종 황제의 이름은 중국 민중들에게 사랑받아온 이야기 『수호전』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수호전』을 모르는 중국인은 없으며, 마오 쩌둥이 이 이야기로부터 혁명에 필요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양산박에 틀어박힌 송강을 비롯한 1백 8명의 호걸들은 다양한 활동을 한 끝에 최후에는 휘종 황제에게 귀순하여 충성을 맹세한다. 중국에서는 민중에게도 휘종은 가장 인기 있는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 자신은 비극의 황제로서 오랫동안 중국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존재였다. 25년에 이르는 그의 치세는 만리장성 북쪽으로부터 쳐들어온 이민족 금金에 의해 무너졌다. 수많은 자녀와 황족들, 그리고막대한 재보와 함께 그 역시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만주 땅으로끌려갔다. 그것은 바로 영광과 영화의 정점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지옥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유폐된 죄수의 몸으로 수년을 지내고,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쓸쓸하게 북만주에서 생을 마쳤다.
사람들은 휘종을 '풍류 천자'라고 부르거나 혹은 '망국의 황제'라고 일컫는다. 예술적 재능을 타고나고, 세련미와 우아함, 풍요로움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국도 개봉의 번영의 정점에서, 왜 그는 망국의 황제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의 중국, 송대에 관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외면상으로는 풍요로움을 누리는 현대 사회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번영의 절정에서 나락의 밑바닥으로 침몰한 풍류 천자와 그 주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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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황제 옹립에 관여하여 궁정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생각에서 발단이 된 이 분별 없는 사건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황장자는 발견되었고 이선시는 거처가 인수전으로 옮겨졌다. 훗날 이 사건은 선제가 총애하던 비였으며 더욱이 현 황제를 양육한 사람인 이선시에 대한 망은의 처사라고 하여 새삼 논의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과를 거쳐 황장자 유교가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희종 천계제인데, 명조 역대 황제 중 가장 어리석은 군조로 평가되는 황제이다.
이상의 세 사건이 이른바 '삼안三案'(정격ㆍ홍환ㆍ이궁의 안)인데 모두 궁정 내부에서 발생한 것으로, 외부에서 보면 그 진상을 알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신종 시대의 황태자 책립 문제에서 발단이 되었고, 논의 과정에서 조정 신료 사이에 의견이 나뉘어 당파가 조성되고 정치 비판과 권력 쟁탈이 되풀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잘것없는 사건이 마치 중대한 정치 문제라도 되는 양 심각하게 논의되었다는 것이 만력 연간에서 천계 연간에 걸친 시대의 특징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광기와 퇴폐의 시대였던 것이다.
정계와 관계에 당파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동서고금에 걸쳐 특별히 진기한 일은 아니다. 명대의 관료도 그러한 관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줄신지에 따라 향당을 결성하였는데, 만력이후 이러한 향당과 정치적 주장이 결부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신종의 친정 시대는 정치 부재의 시대였지만, 이 무렵 하나의 정치 당파가 탄행하였다. 후에 '동림당'이라고 불린 집단이다.
이 일파는 최종적으로는 환관의 전횡에 반대하여 반反환관당의 성격을 강하게띠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반장거정 집단이었다. 다방면에 걸쳐 국정 개혁을 완수한 장거정은 부득이했다고는 하지만, 개혁 과정에서 반대파의 언론을 탄압하고 수많은 정적을 축출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였다. 따라서 그가 사망하자 그 반동으로 언론 활동이 급격히 활발해지고, 관료도 관료 후보자인 학생도 일제히 입을 열어 장거장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풍조 속에서 동림당이 탄생한 것이다.
장거장에 대한 처분이 결정되고 실시된 후에도 그들은 스스로 '청의파'라 칭하고서 정의의 기치를 내세우고 야당적 언론 활동을 계속하였다. 만력 21년(1593)의 대계大計, 즉 관리의 근무 성적 평정과 만력 22년부터 시작된 황태자 책봉 문제 등이 주요 활동 무대였는데, 그 지휘자로 지목된 고헌성이 황태자 책봉 문제 등으로 인해 신종의 노여움을 사 귀향하게 된 무렵부터 당파적 성격을 명확히 띠기 시작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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