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과 역사에 대한 재해석
동양과 서양은 초자연적 존재인 용에 대해 상반된 개념을 갖고 있다. 동양에서는 용을 신적인 존재, 상서로운 존재로 여겨온 반면, 서양에서는 괴물 내지 악마로 치부해왔다.
동양에서 용은 최고의 위엄과 권능을 상징한다. 비바람과 구름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전지전능한 존재이자 신의 개념이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기린, 봉황, 거북과 더불어 사령의 하나로 여겼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동방의 수호자로 신성시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에도 동방을 담당하는 신으로써 동쪽 벽에 청룡이 그려져 있다.
서양에서도 초창기에는 용을 인간에게 숭배 받는 신으로 여겼다. 서양의 용, 즉 드래곤(Dragon)은 도마뱀 내지 뱀을 뜻하는 라틴어 ‘draco’에서 유래되었는데, 서양의 초기 신화를 보면 용이 신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빌로니아의 창세신 ‘티아매트’다. 티아매트는 아시리아 · 바빌로니아 신화에 나오는 원초(原初)적인 바다의 인격신(人格神)이자 여성신(女性神)이며 세계를 낳은 존재다. 그러나 기독교의 등장으로 그 상징성이 악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변질되었다. 용의 어원 'draco'가 뱀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창세기에 인간에게 원죄를 가져다 준 뱀의 의미와 결부시켜 용을 악마의 상징으로 치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개 중세 무용담에 등장하는 용들은 인간을 괴롭히고 해악을 끼치는 악마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처럼 상반된 동서양의 용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로 아우르고 좀 더 인간 친화적인 존재로 표현해낸 작품이 바로 나오미 노빅의 《테메레르》 시리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테메레르는 동양 용과 서양 용의 특성을 흥미롭게 섞어놓은 캐릭터다. 몸통이 커다란 뱀과 비슷하고 날카로운 발톱과 날개가 달려있다는 점에서 서양적이지만, 파괴력을 지닌 진동과 바람으로 한 국가를 지키는 수호신적인 면모를 지녔다는 점에서 보면 다분히 동양적이다. 출신도 중국이며 서양 용 특유의 불과 수증기를 내뿜는 능력 대신, 고상함과 지혜를 갖춘 용이다.
판타지로 재창조된 19세기 전쟁사
용이 나오는 소설이나 영화는 그 동안 수차례 만들어진 바 있으나, 실제 역사 속에 용을 등장시킨 작품은 많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용이 나오는 소설 하면 무협소설이나 중세무용담, 중세 내지 시대가 불분명한 가상세계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물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나오미 노빅의 《테메레르》 시리즈도 그저 그런 종류의 유치한 판타지일 거라고 예상한다면 큰 오산이다. 《테메레르》 시리즈는 그 동안 용을 등장시켰던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을 스케일 면에서 압도하며 대체역사판타지를 좋아하는 전세계 독자들의 시선을 그러모으고 있다. 현재, 24개국에 번역 출간되고 있는 이 작품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면서,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던 공군 부대와 그 공군 부대의 주요 구성원인 각종 용들, 다양한 성격을 지닌 비행사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제1권의 주요 배경은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9세기 초의 유럽이다. 특히, 나오미 노빅은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는 트라팔가르 전투를 재해석하여 공군들이 펼치는 공중전과 실제 해전을 결합시켰다. 실제로, 트라팔가르 해전은 1805년 10월 21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스페인 남서쪽 끝의 트라팔가르에서 격파한 해전이다. 이 해전을 통해 영국은 나폴레옹의 침공을 막았고. 이후 100년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면서 해양 강국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테메레르는 이 트라팔가르 전투를 측면 지원하고, 이후 도버 전투에 직접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역사 속 인물들인 넬슨 제독, 나폴레옹, 빌뇌브 제독 등이 이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 그려지는지도 볼만 하다. 해전과 공중전의 각종 전략전술이 등장한다는 점도 이 소설의 재밋거리다.
놀라운 상상력과 뛰어난 캐릭터의 구현
나오미 노빅의 《테메레르》 시리즈는 데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상상력과 뛰어난 캐릭터 구현으로 세계 각국의 독자들을 매료시키며, 2007년 휴고상, 캠벨상, 로커스상, 콤프턴크룩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저력을 발휘했다. 현재 로커스상과 콤프턴크룩상을 수상했고, 휴고상과 캠벨상은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 출판되는 《테메레르-왕의 용》은 총6권에 달하는 판타지 대서사물 《테메레르》 시리즈의 서두에 해당하는 만큼, 캐릭터 소개에 상당부분 치중하고 있다. 대체역사소설이긴 하지만 내용이 무거워서 읽는 이의 숨통을 압박하는 게 아니라, 역사에 근거를 두면서도 판타지를 섞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엮어가고 있어 굉장히 재미있다. 요즘처럼 되는 것 없고 갑갑하기만 한 시절, 사회의 온갖 제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숨통을 트여주고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멋진 작품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