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열혈 줄리엣의 선택,
부모님을 속이고 로미오를 버리고 몰래 배낭을 꾸리다
엄마가 공항에 데려다주겠다는 걸 겨우 말렸다. 엄마한테 딸은 서른 살, 마흔 살이 돼도 어린아이다. 1년 동안 혼자 외국을 여행할 거라고 했다면 “안 돼, 총 맞아 죽어.” 발끈하셨겠지.
“내가 연출한 공연이 해외 순회공연 간대. 내년 가을에 돌아올 거야.” “우리 딸, 출세했네. 어디로 가? 몇 명이 가?”
“걱정 마. 배우랑 스태프랑 다 같이 떠나.”
거짓말은 즉효다. 엄마가 용돈까지 챙겨주신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로미오, 로미오다. 30분 후면 이별인데, 로미오가 삐쳤다. 어떻게 남자친구를 두고 1년이나 여행을 갈 수 있느냐는 거다.
“넌 지금 여행을 갈 때가 아니라 결혼할 때야!”
막판에 발목을 잡는다. 세상엔 두 가지 외로움이 있다. 다른 대상에게서 소외되는 외로움과 자신의 존재와 깊이 만날 수 있는 외로움. 일상 속에선 소외되는 외로움 때문에 몸과 마음이 축난다. 가족, 일, 연애도 위로가 안 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나는 자아의 밑바닥과 만나고 싶다.
“로미오, 안녕! 말랑말랑하고 밝은 사람이 돼서 돌아올게.” (프롤로그 중에서)
낯선 곳에서 혼자 밥 먹기, 낯선 이에게 말 걸기…
이제부터 하나씩 해보는 거다!
모든 게 나는 내가 ‘혼자’인 게 쑥스럽고 창피하다. 만날 친구도 없고 약속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다. 더위에 축 처져 싸구려 여관방에 누워 있기, 속옷 빨기, 사람에 치이며 왕궁 돌아다니기…… 이딴 걸 하려고 해외여행을 온 건 아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바라던 게 뭐더라?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 ‘옛사랑의 찌꺼기를 설거지하는 것’, ‘유명한 그곳에 가는 것’, ‘말도 못할 고생을 해보는 것’ 등등. 꿈꾸던 모험의 모습은 단순했다. 그런데 방법이 잘못됐다. 배짱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시간을 만들려면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여서 뭐든 찔러보고 맛봐야 한다.
구석에서 혼자 편지 쓰는 남자가 눈에 띈다. 혀끝으로 ‘hello'를 몇 번이나 연습하며 그 사람한테 다가갔다. ”hello!" 말! 말을 걸었다! 그냥 얘기나 하자고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본문 중에서)
서른이 될 나에게 주는 선물
뜻밖의 로맨스와 말도 못할 고생, 그리고 새로운 자극……?
비포선라이즈, 비포선셋
게스트하우스 문 밖에서 일본 남자가 기웃거린다. 그가 엉성한 영어로 주인을 찾는다. 아무도 그 남자에게 주지 않는다. “캔 아이 헬프 유?(도와드릴까요?) 내가 구조의 손길을 뻗쳤다. “한국 분이세요?”괜히 영어로 나불댔네. 그가 한국말로 묻는다. “일본 사람인 줄 알았어요.”“일본 사람이에요.”그의 이름은 다유키. 취미로 한국말을 4년 동안 배웠다고 했다. 그와 푸시 산을 오르내린 게 벌써 네 번째다. 대화에 정신이 팔려서 별다른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얘기가 오가는 상태. 그것이 마음에 든다.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여자처럼 고운 다유키의 손을 보며 내가 물었다. “있었어요. 옛날에…….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만난 지 한나절 된 다유키와 많은 것이 통한다. 로맨스가 무럭무럭 자랄 것 같은 예감이다. ‘나에게는 로미오가 있어요’하고 말해버려 괜한 찬물을 끼얹긴 싫다. 그는 내 타입이 아닌데, 이 들뜬 감정의 정체는 뭘까?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미지의 사람에게 달려가는 호감과 궁금증…….
-‘비포선라이즈, 비포선셋’중에서-
무지개를 본 순간, 작렬하는 고통
산티아고를 향해 떠난 지 26일째. 날은 막 더워지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다. 물줄기 끝에 무지개가 생겼다. “으아악!” 그 순간, 무지개를 본 그 순간…… 개가 내 장딴지를 물었다. 바지는 뜯겨져 나갔고 너덜거리는 살점 위로 피가 쏟아진다. 개새끼는 나처럼 혼자가 아니다. 빈집에 묶인 오토바이만한 개, 작은 치와와와 한패다. 세 마리가 동시에 으르렁댄다. 어떡하나. 흐르는 피는 뭘로 막지?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주위는 온통 산과 벌판이다. 땡볕에서 119를 기다리다간 탈진하거나 심장을 물릴지도 모른다. 손수건으로 다리를 동여매고 천천히 움직였다. 서럽다. 이렇게 아픈데 엄마를 부를 수도, 로미오를 찾을 수도 없다. 내 장딴지의 상처는 온전히 내 것이다. 얼얼한 통증에 눈물이 솟아도 혼자 닦을 수밖에…….
- ‘똥X와 벌인 투쟁’중에서-
한국을 기억하는 사람들
카밀라 언니가 돼지고기 카레를 듬뿍 얹은 달밧을 내온다. 그런데 쟁반을 옮기는 언니의 오른손이 이상하다.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짧게 남아있고 세 개의 손가락이 있던 자리는 텅 비었다. 설마, 설마 ……. “담배 펴유?” 결혼식을 제쳐두고 카밀라 언니를 따라 나왔다. 언니가 담배 연기를 가볍게 ‘후우’ 내뱉는다. 짐작이 맞았다. 언니의 손가락은 가죽을 마름질하는 프레스 기계 속으로 딸려 들어갔다. 당시 카밀라 언니는 불법체류자 신분이었고 보상은커녕 회사에서 쫓겨났다. 언니와 같은 처지의 이주 노동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공장 구석에서 두들겨 맞고 팔다리가 잘리고 강간당하고. 그들과 언니가 뭉쳐서 한 달 동안 보상을 요구했고 겨우 보상을 받아낼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 강제 추방됐다. 네팔로 돌아온 언니는 겨우 기운을 차려서 지금은 자신처럼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을 돕고 있다. 공짜로 얻은 라마승의 방에 누워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었다. 카밀라 언니는 차마 보고 싶지 않은 증거다. 우겨도, 우겨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진짜 성품이다. 낯선 외국에선 우체국 하나 찾기도 힘든데, 언니는 어떻게 병원에 가고 보상금을 받아내고 울음을 추슬렀을까.
-‘아랫마을 결혼식 윗마을 장례식’중에서-
굿바이! 철부지 줄리엣
그랑비아 거리에 있는 여행사에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스페인 광장에서 줄리엣과 이별했다. 제 맘대로 살다가 젊어서 죽은 줄리엣의 앳된 열정은 서른이 된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문근영이 평생 국민 여동생일 수는 없는 거니까. 철부지 줄리엣과도 이별이다. 계속 배우를 하고 연극을 하고 글을 쓰며 그럭저럭 살아가려면, 다른 모습과 다른 배역이 필요하다. 푼수 같은 노처녀, 아이를 줄줄이 낳은 아줌마, 극장을 차려서 떼돈을 번 여사장, 자유로운 이혼녀, 손자 손녀를 안은 할머니 등등 시간이 주는 옷을 입고 그 역할이기 때문에 갖는 진실과 매력을 찾아내야겠지. 안녕, 줄리엣.
- 본문‘새로운 배역을 찾아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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