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미라는 개념은 역사적이다. 소설사의 각 계절에는 각기 다른, 재미를 누리는 방법과 누리게 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현대 소설은, 플롯이 주는 재미를 줄이고 다른 종류의 재미를 늘리려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재미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열렬한 숭배자로서 나는 늘, 어떻게 되었건 간에,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모름지기 그 플롯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재미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중략)
내가 믿기로, <소설이 독자에게, 독자가 바라던 것을 줄 수 있다면 그 소설은 인기가 있다>는 말과, <소설이 인기가 있다는 것은, 독자에게, 독자가 바라고 있는 것만 주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다르다. 두 번째 진술이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디포나 발자크 같은 소설가, 최근 작품으로는 『양철 북』이나『백 년 동안의 고독 』만 떠올려 보아도 자명해진다.
--- p.90
아드소는 나에게 대단히 중요했다. 처음부터 나는 한 사춘기 소년의 입을 통해 이야기(그 미스터리, 정치적, 신학적 사건, 심지어 이러한 사건이 지니는 이중적인 의미까지)를 하게 하고 싶었다. 이때 내가 말하는 사춘기 소년은 문제의 사건을 경험하고 이것을 사진처럼 그려 낼 수는 있되,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늙어서도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 스승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적멸에 드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것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서평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소설이 지닌 이런 측면들이 고급 독자들에게 별로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감히 말하거니와, 이것을 눈치 챈 독자도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점이, 훈련되지 않은 독자들도 이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만든 특징 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 p.56
내 소설의 제목은, 씌어질 당시에는 『수도원의 범죄사건』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제목을 파기했다. 그 까닭은, 독자들의 관심을 미스터리 자체에만 쏠리게 할 가능성이 농후하고, 독자들이 액션으로 가득한 약간은 황당무계한 책으로 오해하고 책을 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중략)
내 소설의 제목을 『장미의 이름』으로 하자는 아이디어는 실로 우연히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이렇게 부르기로 하고 보니 마음에 들었는데 그 까닭은 <장미>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장미의 상징적 의미는, 그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잘 헤아려지지 않을 정도로 풍부하다.
단테의 <신비스러운 장미>라고 할 때, <장미 전쟁>이라고 할 때, <그대는 병든 장미>라고 할 때의 장미,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장미>라고 할 때,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는 장미이다>라고 할 때, <장미 십자단> 할 때의 장미...... 이런 것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제목이 내가 예상했던 대로 독자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다.
--- p.11
나는 중세에 <대해서> 쓰고자 결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세<에서> 쓰기로 결심했다. 말하자면 그 시대 연대기 작가의 입을 통하여 중세라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가 곧 화자인 수련사였다. 이로써 나는 장벽의 반대편에서 지나간 시대의 화자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풀어 나가면서 나는 당혹하고 말았다. 나는 얼떨결에 조명 아래로 노출되면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범자 노릇을 가장하고 있다가 조명을 받는 바람에 기분이 드러난 연극 비평가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 p.35
나는 대학생이던 즈음의 1953년의 노트를, 이 『장미의 이름』을 쓴 지 2년 뒤에 발견했다.
호레이쇼와 그의 친구는 유령의 문제를 풀기 위해 P백작을 부른다. P백작은, 괴팍하고 무기력한 신사. 이 P백작에 맞서는 FBI의 정신을 지닌 덴마크의 직업 경호대의 젊은 장교. 이야기의 줄거리는 전형적인 비극의 구조를 따른다. 가족들을 모두 모아 놓고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P백작. 살인범은 햄릿이다. 그러나 햄릿은 죽고 없다.
몇 년 뒤 나는 체스터튼이 어디에선가 이런 줄거리를 암시한 것을 본 적이 있다. 파리의 울리포 그룹이 최근에, 가능한 살인 소설의 경우를 모두 입력시키고 소설의 새 가능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독자를 범인으로 삼는 책은 여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결론. 책을 쓰는 데는, 결코 개인적인 것일 수 없는 강박적인 생각이 따라붙는다. 그것은, 책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고, 결국 범인을 캐고 들어가면 우리 모두가 유죄라고 하는 생각이다.
--- pp.113-114
『장미의 이름』이 출판된 뒤로 나는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이 책의 말미에 실린 라티어 6보격 시구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것이 어째서 책의 제목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이 시구가 모를레 사람 베르나르의 「속세의 능멸에 대하여」에 나오는 시구이고, 12세기 베네딕트 회 수도사인 베르나르의 시는 이른바 <어디에 있느뇨>의 테마(뒷날 비용의 <지난날 내린 눈은 어디 있느뇨>를 통하여 우리에게 낯익게 되는)로 이루어져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베르나르는, 어제의 영광, 영화의 도시, 아름다운 왕녀들은 모두 무(無) 속으로 사라지되 뒤에 그 순수한 이름을(이름만이라도, 혹은 적어도 이름은) 남긴다고 덧붙이고 있다. 나는 아벨라르가 <장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통하여, 언어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과, 존재하였으되 회멸된 것을 드러내는지 설명했던 것을 기억한다.
--- p.8
『장미의 이름』이 출판된 뒤로 나는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이 책의 말미에 실린 라티어 6보격 시구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것이 어째서 책의 제목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이 시구가 모를레 사람 베르나르의 「속세의 능멸에 대하여」에 나오는 시구이고, 12세기 베네딕트 회 수도사인 베르나르의 시는 이른바 <어디에 있느뇨>의 테마(뒷날 비용의 <지난날 내린 눈은 어디 있느뇨>를 통하여 우리에게 낯익게 되는)로 이루어져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베르나르는, 어제의 영광, 영화의 도시, 아름다운 왕녀들은 모두 무(無) 속으로 사라지되 뒤에 그 순수한 이름을(이름만이라도, 혹은 적어도 이름은) 남긴다고 덧붙이고 있다. 나는 아벨라르가 <장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통하여, 언어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과, 존재하였으되 회멸된 것을 드러내는지 설명했던 것을 기억한다.
--- p.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