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기 내내 우리가 추적해 왔던 '위대한 거부'의 주요 원동력은, 사회적 소용돌이가 미국, 프랑스, 독일을 강타했던 1968년의 사건에서 절정에 달했다. 1968년 2월에 서베를린에서 국제 베트남 회의가 폐막된 후 이어서 4월 11일에는 베를린에서 독일대학생사회주의동맹 지도자 두취케의 암살 기도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즉시 슈프링어 언론에 반대하는 일련의 전국적 시위들을 촉발했다. 당시에 슈프링어 언론사는 모든 시위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으며, 독일 언론의 30% 이상을 지배하고 있는 언론 왕국의 위력을 우려한 자유주의적 작가들에 의해 이미 비판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두취케의 피습 직후 열린 그해의 부활절 행진에는 주로 베트남전 확대를 성토할 목적으로 3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베트남전은 그해 5월에 밀라이(MyLai) 대학살[밀라이는 베트남 북부의 작은 부락 이름이다. 베트남 전쟁 중인 1968년 3월에 100명이 넘는 이 마을 주민들이 미군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엄청난 비난이 쏟아진 후 관련 지휘관들은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받았다.]로 악화 일로를 치달았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그달에 파리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으며, 이때 학생들은 당국으로부터 중요한 양보를 얻어낸 것처럼 보였다. 이런 사건들의 여파로 독일에는 주요 도시의 거리와 대학 캠퍼스에서 끊임없이 시위가 일어났다. 대학교의 학생 운동은 서독의 낡은 고등 교육 체계를 급격하게 개혁할 것을 요구했다. 더욱이 경찰과 여타 당국들의 과잉 반응은 그달 말에 끝내 통과된 비상조치법을 남용할 수 있다는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 1968년의 '프라하의 봄'에서 느꼈던 짜릿한 감흥과 이어서 그해 8월에 바르샤바조약기구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을 때 받았던 환멸감은 중국 모델의 노선에 따라 '문화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과 뒤엉켜 있었다. 5월에 훈스뤼크의 발데크 성에서 열린 제5회 국제 가요제와 이어서 9월에 에쎈에서 열린 국제 가요제는, 혁명적 사건들의 국제적 성격과 문화적으로 폭넓은 변화 요구의 의제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해 10월에 프랑크푸르트 연례 서적 박람회장에서 주르캄프사와 로볼트사 같은 대형 문학 출판사들이 좌익 운동 덕택에 돈을 버는 방식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다시 경찰력이 동원되었다.
같은 시기에 많은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문학 생산을 '민주화'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신좌파의 전형적 잡지인 엔첸스베르거의『쿠르스부흐』는 주르캄프사에서 바겐바흐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새로운 종류의 모험을 보여준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아마 이러한 여망을 가장 완전하게 실현한 것은 1973년에 창작과 출판 공동체인 '작가편집사(AutorenEdition)'의 설립일 것이다. 여기서 원고는 동료 작가들이 선출한 동료들로 구성된 편집 위원회에서 평가받았다.
새로운 경향이 많이 나타났고 1970년대와 그 이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젊은 세대 예비 작가들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요컨대 갖가지 일들이 일어난 혁명의 해의 이러한 다양한 양상들은 재야 운동 단체의 활동이 절정에 달했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듬해에 빌리 브란트가 선거에서 승리하고 대연정이 종식됨으로써 이러한 재야 운동 단체의 활동은 그 당시 형태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해에 수없이 일어난 격동의 사건과 핵심 쟁점들은,『쿠르스부흐』와 여타 좌익계 잡지들의 지면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신문에도 도표상으로 신기록을 세웠다. 그것들은 연방 공화국이 이제 본질적으로 세대간의 갈등에 봉착했음을 뚜렷이 보여주었으며, 대학생 세대들은 그들의 모든 선언문에서 국가를 복고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이라고 간주했다. 한 가지 특별한 시위는 1968년 3월에 안드레아스 바더, 구드룬 엔스린과 그 일당들이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는 표시로 한 프랑크푸르트 백화점에 소형 소이탄을 설치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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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1일부터 8워 16일까지 베를린에는 제11회 올림픽 경기가 개최되었다. 이 제전은 나치 독일에 의해서 완전히 이용당한 국제적인 대규모 교류 행사였다. 매체의 대중 조작은, 괴벨스가 노련하게 지휘 감독했지만 당시까지는 결국 독일 내부에서만 효력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그들은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도 새 체제 하의 독일 민족에 대하여 우호적인 이미지를 받아들이로록 설득할 수 있기를 바랬다.
1935년 9월 15일에 나치의 인종법(독일 혈통과 명예 보호법)이 공포된 후 비판의 목소리는 서방 매체에서 특히 커졌다. 점점 더 늘어가는 신랄한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대대적 선전을 벌일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면『맨체스터 가디언』지는 경기 개막일인 1936년 8월 1일 토요일치의 머리 기사에서, 쿠베르탱 남작의 정신이 이런 올림픽 경기와 차이난다고 솔직하게 말했는데, 그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금년에 베를린에는 이 경기가 세계 평화나 심지어 한 국가의 긍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한 정당을 위한 광고로서 이용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처음으로 보게 될 것이다. 경기의 운영과 시설은 나치즘의 탁월함을 과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독일의 주택들은 겉만 치장되었으며 다른 겉치장도 행해졌다. 독일 유태인들에게는 독일을 대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극소주의 유태인만 겉치장용으로 포함되었다.>
나치즘은 새로운 파시즘의 위용을 과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독일이 부당하게 비방받아 왔으며 이제 독일은 스포츠와 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부의 통치 하에서 번영을 누리는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입증하겠다고 결심했다. 나치 정부가 베를린의 호텔, 식당, 식품 가게의 가격 인하를 포함하여 모든 관련 사항들을 행사에 필요한 모든 힘을 동원하여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체주의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외국의 손님들은 60%까지 할인된 가격으로 배, 철도,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연극 공연은 관례적인 여름휴가도 없이 계속되었다. 아이스킬로스의 연극<오레스케이아>, 구텐베르크의 성경을 중심으로 꾸민 독일 예술품의 전시회, 음악회, 오페라, 문화계 저명 인사들의 연회 등 이 행사들은 모두 화려함과 조화의 이미지를 연출했다. 괴벨스는 하벨강의 파운 섬에서 2,000명의 손님을 접대했으며, 괴링은 오페라의 초대장을 배포하고 템펠호프 지역에서 공중곡예 쇼를 개최했다. 또한 히틀러는 수상 관저에서 엄청난 수의 특별 외교 사절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그 중에서 로버트 밴지터트 경, 폴란드 외무장관 얀 스쳄베크 백작,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장 벨레-라투르 백작도 들어 있었다. 지나치게 반유태적이며, 노골적으로 도색적인 나치 잡지『데어 슈퇴르머』는 눈에 띄게 진열되어서는 안되었다. 베를린 시 선전국장은 반유태적인 구호들을 모두 없애라는 지시를 받았다. 청결은 베를린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이 시가 자랑하는 보증 상표가 되어야 했다.
당시에 독일 노동전선의 기관지였던『데어 안그리프』지를 구독하는 파시스트적 독자들은, 1933년 이전에는 대중 음식점에서 언쟁을 벌이고 거리에서 주먹 다툼을 하는 등 잔인한 행동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정부가 시키면 언제든지 인종주의적 야만 행위와 폭력을 행사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데어 안그리프』지는 이들에게 경기 초반에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우리는 파리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어야 하며, 비엔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쾌활하고, 로마 사람들보다 훨씬 더 활기차며, 런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세계주의적이고, 뉴욕 사람들보다 훨씬 더 실용적이어야 한다.”
심지어 이런 눈가림용 행사는 두 권 짜리 반(半)관영 출판물『1936년도 올림픽 경기』의 집필자들이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활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찬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미국 대학의 스포츠 경기장이 우수한 지도자를 갖추고 올림픽 챔피언의 산실 역할을 한 사실 외에도, 미국의 인종 혼합은 신선한 피로 끊임없이 회춘할 수 있어서 신체적 퇴화를 막을 수 있었다. 이것은 다른 경우라면 문명의 불이익을 받은 적이 없는 원시인들에게나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
예의를 가장한 국제 스포츠 축제는 총통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민족의 위엄을 보여주도록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심지어 비(非)게르만계 선수들, 특히 “청, 백, 적, 삼색기를 뒤따르는 프랑스의 자랑스런 건아들”도 , 개막식에서 경기장에 입장할 때 나치식 경례를 붙이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행각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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