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3월 중순에서 4월 말까지 한 달 이상 동안 열풍에 휩쓰렸던 모든 사람들, 즉 재배가들과 꽃장수들은 결과를 예상하기만 해야 하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단 몇 주 전만 해도 대단히 비쌌던 튤립들이 연합주 전역에서 꽃을 피워 습한 네덜란드의 봄을 환하게 밝히는 동안 수백 명의 꽃장수들은 자신들이 파산할 것이라는 공포로 점차 여위어갔고, 수백만 길도 규모의 수천 개의 계약들은 처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실제로 열풍에 참가했던 사람들로서는 경제적 재앙에서 살아남는 일이 가장 절실한 관심사이긴 했지만 시장이 무너진 이유도 알고 싶어했다. 물론 자신들이 그 곤경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핶고 모든 희생자들이 그렇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할 변명거리만 찾았다.
많은 사람들은 구근 열풍이 일종의 사기 행위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쪽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동료 꽃장수나 상단의 경매인에게 기만당했다고 믿었다. 또 다른 한쪽 극단에 있는 좀더 적은 수의 사람들은 튤립 매매 자체가 음모였다고 확신했다. 한 익명의 작가는 시장이 20, 30명의 가장 부유한 재배가들과 업자들의 비밀 결사에 의해 조직되고 통제되었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정교하게 가격을 조작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결사가 열풍의 영향 하에 있었던 12개 도시 전체에서 어떻게 동시에 활동할 수 있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책임이 다른 곳으로 돌려지기도 했다. 비밀 결사의 존재를 암시했던 그 작가는 파산자, 유태인, 메노파 신도들의 속임수 때문에 튤립 매매에서 최악의 과열 현상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이 세 집단은 사회에서 고립된 계층이었기 때문에 속죄양으로 몰기 쉬웠다. 무엇보다도 파산자들은 소득의 한도 내에서 생활하라는 신성한 네덜란드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여 그들의 죄를 추궁당했으며 이에 대해 복수할 기회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네덜란드 연합주의 유태인들은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보다는 훨씬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대중들은 그들이 고리대금업이나 다른 형태의 보당 이득 취득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고 의심했으며, 그들은 오랫동안 다른 주민들과 자유롭게 교제하는 것을 금지당하고 있었다.
특히 유태인 남자와 네덜란드 여자의 교제는 심한 비난의 대상이었으며 그들이 기독교인 하인을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메노파 신도들도 아웃사이더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옷으로 쉽게 구별되는 재침례교의 분파였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검정색 옷을 입었으며 긴 자켓과 허렁한 반바지를 즐겨 착용했다. 메노파 신도들은 유아 침례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무기 소지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평화주의자였다. 이 때문에 연합주의 스페인과 교전할 때 그들의 평판은 더욱 나빠졌다. 이런 비난들 중 제대로 된 조사에 근거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제로 튤립 재배가 집단이 일부러 구근 열풍을 조작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전혀 없다.
몇몇 메노파 신도들이 열풍에 직접 관련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발트해 연안의 국가들, 그리고 브라질과 교역을 하였던 자크 클레르크라는 한 상인은 1635년 겨울 이미 구근 하나에 4백 길더나 되는 가격을 받고 튤립을 매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분파의 다른 많은 사람들은 튤립 매매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이었고, 구근을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그만두라고 강력하게 권고하였다. 마찬가지로 실제로 연합주에는 대단히 소수의 유태인들이 있었고, 이 중에서 튤립 매매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은 그 유명한 포르투갈의 재배가인 프란시스토 다 코스타밖에 없었는데 그는 흠잡을 데가 없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파산자의 경우, 설령 그들 중 일부가 용케도 채권자로부터 약간의 돈을 떼먹었다고 해도 열풍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는 사람에 대한 당시의 기록은 없다.
아마도 이런 음모론을 믿고 있었던 꽃장수들은 소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상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가격을 조작했다고 의심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가격 조작은 사기 경매라는 오래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이 일은 교활한 상인들에 의해 계획되었는데 이들은 자극을 유발하고 다른 사람이 폭등한 가격에 물건을 사도록 하기 위해서 공범에게 높은 값에 구근을 “파는” 방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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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받았던 튤립은 가장 완벽한 꽃잎과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을 보이는 것들이었다. 실제로 황금시대의 네덜란드 재배종들은 정교하고 때로는 선동적인 색깔 때문에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알려져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됐다. 1630년대 중반이 되자 13종 이상의 튤립이 생산됐는데 각각 서로 다른 색상 배열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빨강색, 노랑색, 희색을 띤 단색의 다순한 튤립인 코울레렌에서부터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색깔을 띠는 후기 개화종인 마르크베르트리넨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코울레렌은 야생 튤립이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야생 튤립과 가까운 친족 관계의 재배종이었지만 마르크베르트리넨은 꽤 복잡한 변종이었음에 틀립없다. 그것은 대부분 플랑드르와 프랑스에서 재배됐으며 네덜란드 튤립 열풍과 관련된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13종 가운데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것은 로젠, 비올레텐, 비바르덴이었다. 로젠 종은 가장 수가 많았는데 흰색 바탕에 붉은 색이나 분홍색으로 윤색된 것이었다. 17세기 초 30여 년 동안, 거의 4백여 개의 로젠 튤립이 생산되어 이름이 붙여졌다. 70여 개의 비올레텐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하얀색 바탕에 자주색이나 엷은 자색으로 윤색되었으며, 비자르덴은 이 중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품종으로 단 24개의 변종만이 있으며 노란색 바탕에 붉은 색, 자주색, 갈색으로 윤색되어 있다. 이미 존재하는 색상배열이 뒤바뀐 변종도 있었는데 이들은 원래의 색상 배열에 따라 분류되었다. 예를 들면 라켄 튤립은 넓은 하얀색 테두리가 있는 자주색 꽃인데 비올레텐으로 불류되었고 소량의 두켄 재배종은 노란색 테두리가 있는 빨간색 곷인데 비자르덴으로 분류되었다.
정원사들을 참으로 흥분시켰던 것이 바로 이런 무늬가 만들어내는 대조적인 색상이었으며 튤립 열풍을 이해하려면 17세기에 원예사들이 알고 있었던 다른 꽃들과 튤립이 어떻게 구별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튤립의 색깔은 일반적인 식물의 색깔보다 더 짙고 더 농축된 것이었다. 즉, 단순한 빨간색은 밝은 진분홍이 되었고 흐린 자주색은 매혹적인 명암의 검은색에 가까운 색이 되었다. 또한 다른 잡색 꽃의 경우 꽃잎의 경우 그 색의 경계가 대단히 뚜렷했다.
두드러진 색상의 네덜란드 재배종들은 보통 꽃잎 가운데가 진한 색이 나타나거나 가장자리에 테두리가 있어서 깃털이나 불꽃처럼 보였다. 이 색깔들이 때때로 줄기에 얼룩덜룩한 점이 있는 것처럼 나타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꽃의 바탕색은 오염되지 않았으며 이것들은 변종에 따라서 항상 흰색이거나(때때로는 푸른빛을 띠기도 한다) 노란색이었다. 그 무늬는 각 꽃마다 너무나 독특해서 서로 아누 비슷한 종의 꽃일지라도 똑같은 것은 없었다.
네덜란드의 튤립 애호가들은 튤립 열풍의 초창기부터 엄격한 기준에 따라 이런 색상의 미세한 변화에 따라 꽃의 등급을 달리 매겼다. 가장 높게 평가받아 “최상”으로 꼽히는 튤립은 전체적으로는 흰색이나 노랑색을 띤 것으로, 꽃잎 중앙이나 가장자리에서 자주, 빨강, 갈색으로 얇은 띠 모양의 불꽃이 나타나는 줄무늬 변종이었다. 전문가들은 밝은 색이나 너무 요란한 것은 “음란”하다고 생각하여 무시했으며 그 가치를 낮게 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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