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가 유비와 함께 하비성에서 여포를 무찔렀을 때 유비 등은 여포의 관사를 철통같이 지켜 단 한 명의 병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조 휘하의 대장들은 초선의 미모를 소문으로 들었기 때문에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흥분하면서 방해자인 관우나 유비를죽여달라고 조조에게 부탁했다. 조조는 고심하며 측근인 정욱과 의논했는데 정욱은,
“이번 기회에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술책을 펴는 게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사람을 보내어 초선을 처형하기 위해 연행한다고 말하면 관우는 반드시 초선을 위해 선처해주기를 호소할 것입니다. 그때 대범한 태도를 보여 초선을 관우에게 넘겨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유비와 장비는 나중에 그녀 때문에 시끌벅적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겠지요. 그들이 반대하면 관우는 이에 앙심을 품을 테고 세 사람 사이는 이 일을 계기로 금이 가고 말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이상은『관공, 월야 초선을 보내다』에 의거)
조조는 그렇다면 한 발 더 나아가서 초선을 유비에게 주는편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초선을 유비에게 줘버렸다. 유비나 장비는 순식간에 초선의 매력에 빠져들었는데, 관우만은 달랐다. 그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동탁도 여포도 이 여자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지. 이런 상태로는 유비나 장비도 조만간 초선을 쟁탈하기 위해 반목하게 될 것이 틀림없어. 만일 동탁 일당의 전철을 밟는다면 한나라를 다시 일으킨다는 큰 포부도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야. 초선을 없애는 수밖에 방도가 없겠군.'
마침 8월 대보름이 달빛이 휘영청 적막한 벌판을 밝히고 있었다. 교교한 달빛을 받아 땅 위에는 초선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비쳐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관우의 매서운 눈초리를 온몸에 받은 초선은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잎인지, 비에젖은 모란꽃인지 모를 가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 아무리 관우라 해도 그녀의 애잔한 모습에는 마음이 흔들렸다. 도저히 칼을 든 손이 움직여지지않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청룡언월도를움켜잡은 손에 무심코 힘이 빠지는 순간 털썩 청룡도가 땅 위의 초선의 그림자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초선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그녀의 목이 데구루루 달빛 아래 뒹굴었다.
그림자를 잘랐을 뿐인데 실제로 초선의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는 너무 과장되어 있어서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초선의 목을 베었다는 경극의 설정이 훨씬 리얼리티가 있는 것 같다. 원래 관우와 초선의 설화는무용담 일색인『삼국지』설화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실제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러나 관우가 이해(건안 3년, 198)의 하비성 공략 작전에 참가한 것만은 사실이다.
--- pp.97~99
유장에서 유비 그리고 조비로, 주군을 몇 번이나 바꾼 무장 중에 맹달이라는 자가 있었다. 맹달은 촉과 오의 국경에 접한 신성군 태수로서 위나라 서남 방면의 수비를 맡고 있었다. 맹달은 건안 연간에 관중의 백성들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법정등과 함께 촉나라로 발길을 돌려 그곳을 통치하던 익주목인 유장 밑으로 들어갔다. 건안 16년, 유비가 촉나라로 오자 유장의 명령을 받고 법정과 함게 강릉으로 유비를 맞이하러 갔는데, 거구로 억류당하고 말았다. 이어서 유비가 유장을 항복시켜 촉나라를 장악하자 이번에는 유비 휘하의 장수로서 의도군의 태수가 되었다.
건안24년, 유비가 황충 등의 공에 힘입어 한중을 조조로부터 빼앗았을 때 맹달은 북상하여 방릉을 공격하고 더욱이 유비의 양자인 유봉 휘하로 들어가 상용을 공략하고 그 태수인 신탐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양양과 번성을 공격하고 있던 관우가 맹달에게 지원 부대 파견을 요청했을 때 이를 거절해버렸는데, 결국 관우는 싸움에서 패배하고 죽임을 당했다. 맹달은, 상용 주변에 사는 백성들은 새로이 귀순해 온 자가 많아서 군대를 움직이면 동요하여 배반할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고 지원군 파견 요청을 거절한 것이었지만, 맹달이 명령에 불종하여 군대를 파견했더라면 관우가 이때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비는 관우를 높이 평가하고 아꼈다. 그런 만큼 관우의 일이라면 유비는 자주 이성을 잃고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관우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전투로서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이릉 전투를 일으킨 것도 이러한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맹달은 유비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도 관우를 죽게 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여 유비의 곁을 떠날 뜻을 굳히고 편지를 남겨둔 채 자신을 따르는4천여 가구를 이끌고 조비에게 항복했다. 연강 원년의 일이다.
조비는 아버지인 조조가 죽고 한나라에서 위나라로의 정권 이양 의식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맹달의 투항을 환영하고 투항자를 우대하는 조조 이래의 전통적 정책을 계승하여 맹달을 과분하게 대우하여 산기상시, 건무장군에 임명하였고, 거기에 평양정후에 봉하고 더욱이 방릉, 상용, 서성의 세 개의 현을 지배하는 신성군의 태수로 부임시켰다.
위나라 조정에서는 제나라 멸망을 앞당긴 연나라 명장 악의 가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결국 조나라로 명명했던 고사를 들어 맹달을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과장하는 떠들썩한 분위기가 이루어졌으나 그 이면에는 조정 내부의 반목이 가로놓여 있었다. 특히 사마중달은 맹달의 행동을 경계하고 몇 번인가 조비에게 직언을 할 정도였다.
황초 7년에 문제 조비가 사망하자, 최대의 후견자를 잃어버린 맹달에게 군신들의 질투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렇게 되자 맹달은 문제가 개인적으로 총애한 사람이었던 만큼 그 지위까지도 안전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곤경에 빠진 맹달의 상황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더욱더 맹달의 마음을 흔든 사람은 촉나라 승상인 제갈공명이다. 공명은 맹달에게 몇 번씩 사신을 보내, 촉으로 귀순할 것을 종용했다.
공명은 맹달을 영입하면 오나라를 대신할 동쪽의 병력으로 삼을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공명은「출사표」를 올리기에 앞서 맹달에게 밀서를 보냈다. 그 밀서를 전해준 자는 공명의 정보 조직인 '와룡이'의 베테랑 채붕이었다.'와룡이'는 전국시대의 묵가의 후예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특수한 재능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었다.
--- pp.237~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