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나오게 된 인연 : 이 책은 화엄경 속의 많은 게송 속에서 소승이 임으로 발췌하여 나름대로 불교의 전반을 이해시키기 위해 게송에 대한 해설을 한 게송집입니다.
또한 이 게송의 해설은 사실 소승이 작년 여름부터 운영하는 인터넷 “불교경전 총론”이란 홈페이지(http://www.sejon.or.kr)의 회원들에게 한달에 서너번씩 화엄경은 물론 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메일로 보내지던 것이 그 시초의 연(緣)입니다.
현재 한 두달 정도를 해보았는데, 갑자기 화엄경 전체를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업은 무비스님의 80화엄경 한글본을 주문(主文)으로 이미 100권에 달하는 화엄경에 대한 해설과 자료, 논문 등을 모아놓은 제 인터넷상의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검색하는” 방법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게송은 복사로 처리하고 따로 소승이 언급한 부분은 직접 워드로 작성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시작에서 워드작업 교정 및 편집까지 걸린 시간이 작업한 날로만 치면 보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가장 시간을 많이 요하는 일은 수많은 게송 중에 몇 개만을 골라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아마 소승의 워드가 조금만 익숙해도 반은 시간 절약이 되었을 것입니다.
작업이 너무 흥미가 있어 급성 심근경색으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던 소승으로서는 몸에 무리가 되지않게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것이 갑갑할 지경이었습니다.
소승은 학자도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이도 아닙니다. 그래서 솜씨 좋으신 스님들의 세련되고 유유자적한 글이나, 절 담장안의 얘기를 맵씨있고 재치있게 그려내시는 스님들의 분위기에 익숙한 분에게는 투박하고 때론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승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질퍽하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최대한 억제하며 나름대로는 최대한 세련된 척 노력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해설을 붙이는 작업은 소승에게는 투쟁과 저항이 팽배했습니다.
잘못 이해되고 왜곡되는 불교의 현실속에 “세련”과 “유유자적”은 소승에게는 “사치”일 뿐입니다.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현재의 우리 불교가 “부처님의 불교”인지 아니면 “조사와 승단”의 불교인지 그도 아니면 “신도를 위한 불교”인지 소승은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승의 해설은 의도적으로 초안 그대로 발간하였습니다. 물론 오자나 탈자는 교정을 보았지만 표현을 다듬거나 처음 선택된 단어를 고쳐 소승의 품위를 지키려는 의미 없는 짓은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책을 보는 이들을 가벼이 여긴다 책망하는 이도 있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 중 핵심인 화엄경의 게송을 대하는 이의 수준이 그 정도라면 아무리 친절하고 고상하고 수려한 글로 설명했다 한들 게송의 한 귀절 이나마 이해하겠습니까?
소승의 좌충우돌을 시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중이 오히려 중생의 “보험회사 설계사”로의 전락은 면해 보려는 발버둥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 해설 중 ( )안의 용어 풀이도 문맥에 맞추느라 소승이 할 수밖에 없었음을 밝혀 둡니다.
불기 2546년 정월 부처골 용화사 무설설당(無說說堂)에서 성 법 합장 - 성법 스님 (지은이) ( dharma@sejon.or.kr )
중생과 떠난다 ‘인터넷 삼장법사’ 성법스님
스님은 인터넷 *사바세계 안으로 들어갔다. 인터넷 사이버 공간은 또 하나의 사바세계다. 스님은 인터넷에서 경을 읽고 불법(佛法)을 설파한다. 홈페이지나 e메일을 통해 가르침을 전하고 나눈다. 그러니 “절이 없어도 상관없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그가 던진 화두는 절이나 교회를 찾지 않아도 진정한 불자와 신자의 길을 걸을 수 있음을 이 땅에 깨우쳐주는 듯했다. 스님은 불교와 인터넷의 만남을 일컬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했다. “있는 게 없는 것이고, 없는 게 있는 것이니…”.
경기 고양시 관산동에 있는 용화사의 주지 성법(性法)스님(45). 그는 아무도 하지 않고,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인터넷 불사(佛事)’를 혼자의 힘과 의지로 행하는 중이다. 최소 10년을 기약하고 시작한 역사(役事). 화엄경·법화경 등 방대한 불교 경전과 불교관련 교리·이론 자료는 물론이고 종교에 관한 모든 공부 자료를 인터넷에 올리고자 한다.
‘불교경전 총론’(www.sejon.or.kr). 스님의 사이트를 보면 누구라도 “정말로 혼자 했느냐”고 묻게 된다. 우선 엄청난 자료의 양에 압도당한다. 자체로도 방대한 경전 번역본뿐 아니라 각 장별로 예닐곱가지씩 해설본을 붙여놓았다. 또 기초교리, 불교와 과학, 불교미술, 비교종교 등으로 구성한 ‘불교 쉽게 알기’ 자료도 끝이 안보일 정도다. 약간의 이미지 자료도 있다지만 텍스트의 총량이 3기가바이트(GB)를 훌쩍 넘는다. 글자 수로만 따지면 3억여자, 신문 20여만장 분량이다. 스님이 직접 글자를 입력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수백권의 책과 논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사이트에 올린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불자들만을 위한 ‘전문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쉽게 보고 배울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는 점이 특별하다. 실제로 지난해 5월 사이트를 개장한 이래 가입한 회원 5,000여명 중 비종교인, 타 종교인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회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보다 친절한 종교 백과사전은 없다” “현대판 삼장법사와 같다”고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스님은 병이 났다. 석달째 병원에 입원중이다. 불교미술 관련 그림자료를 스캔하다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갔다. 심근경색이라고 했다. “그놈의 인터넷 불사 때문”이다.
절이 아닌 병실에서 만난 스님은 컴퓨터를 켜놓고 링거를 꽂은 채 ‘독수리 타법’으로 힘겹게 게시판 답글을 올리고 있었다. 지독스레 매달리고 있는 인터넷 불사. 도대체 왜 그럴까, 무엇 때문일까….
“내가 아니면 이거 할 사람이 없소. 이건 하나의 생명이오. 내가 여기서 그치면 정법이 세속에 지고 말아요. 그래서 목숨을 내놓았소. 난 이 무형(無形)의 불사가 불교계에 어떤 관심을 일으켜주기를 기대하지 않고 있소. 이 정도 털끝만한 이야깃거리라도 회자될 수 있는 풍토라면 나처럼 우둔한 중이 이처럼 겁없는 작업에 도전하기로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오”
스무살때인 1977년 출가(出家)한 스님은 처음 10여년간 오직 경전 읽기에만 몰두했다. 대학입시 공부하러 절에 들어갔다가 발심*한 계기는 “불현듯 절공부 4년이 대학공부 40년보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했고, 경읽기에 매달린 것은 “경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어서”라 했다.
스님의 장서는 5,000여권을 헤아린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고서와 희귀서도 수없이 많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책을, 얼마나 공들여 읽었는지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다. 다만 한가지 일화를 전할 수 있다. 어둠침침한 불빛 아래서 책을 읽고 또 읽다 녹내장·백내장을 다 얻은 스님.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한다. ‘이제부터는 눈이 멀기 전에 한권이라도 더 읽어야겠구나’.
스님에게 경전은 ‘근본’이고 ‘원칙’이다. 시대와 세상이 달라졌다 해도 변치 않는.
“인터넷 불사의 요체는 결국 근본과 원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지요. 불교는 불경, 기독교는 성경으로 되돌아가면 종교의 온갖 비종교적인 요소를 없애고 반인간·비도덕을 몰아낼 수 있지요”
‘비종교적인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그때, 스님의 ‘독설’(毒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를 벌었으니 이만큼 두고, 얼마를 벌려면 또 이만큼 맡겨라. 죽어서 극락이나 천당 가려면 또 이만큼 맡겨라. 이건 종교가 아니라 보험이지요. 절이 보험회사, 중이 보험설계사가 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경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지요. 종교를 통해서 무엇을 얻는다는 허상을 깨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삶의 지침으로 삼는 게 중요하지요. 종교인이라면 ‘정신적 기득권’을 포기하고, 종교인 이전에 상식인이 되어야 합니다”
스님의 ‘쓴 소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불법과 수행을 빙자한 위선에서 벗어나라. 종교적인 틀에 억압받지 말라. 종교를 떠나야 진리가 있다. 종교를 성역으로 삼지 말라. 성직자도 종교적인 증거 없이 대접받을 생각 말라. 종교인이라고 특수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스님은 종교의 참 역할을 “진리를 찾아서 파도치는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사람들에게 조각배를 던져주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스님은 ‘인터넷 고해(苦海)’를 택했고, 앞으로 10년쯤 ‘사이버 주지’로 지낼 작정이라고 했다.
*사바(娑婆)세계 : 중생이 사는, 번뇌로 가득찬 고해(苦海)의 현실세계. 속세. 인간세계.
*정법(正法) : 불교의 바른 교법(敎法).
*발심(發心) : 발보리심(發菩提心). 불도의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일.
施主는 없고, 아직은 ‘말로만 격려’
비닐 씌운 천장에서 비새는 요사채, 용화사안 스님 거처의 당호는 무설설당(無說說堂)이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말(설법)을 한다’. 이는 인터넷 불사를 행하면서 스님이 뼈저리게 느낀 ‘답답증’을 표현한 것이다.
성법 스님의 ‘목숨건 주장’에 대해 교계에서 가타부타 반응하며 공론화되길 기대하지만 현실은 묵묵부답뿐. 그래서 6년째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 또 “중생계의 천박한 속물근성에도 소외감을 느꼈다” 한다. 몇억원씩 빚을 내서 방대한 경전 자료를 구축하는 ‘법보시’(法普施)에 나서고 있지만 ‘말 뿐인 격려’에 그칠 뿐 시주(施主)는 없다. “절이 없으면 시주도 없는 것인가”. ‘화엄경 총론’ 을 CD로 수천장 제작해서 무료 배포하고, 화엄경의 게송(偈訟)중 일부를 해설한 책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를 펴냈지만, 진의를 무시한 채 “장삿속 아니냐”고 의심하는 시선이 더 많았다.
그래서 스님은 불교의 ‘무소유’(無所有)를 다시 말한다. “무소유가 오히려 가장 큰 장애”라는 얘기. 스님은 “최소한의 소유가 수행의 미덕이라는 양(量)으로 단정된 의미에 머물지 말고 질적으로 봐야 한다”며 “컴퓨터도 업그레이드하고 자료 입력 아르바이트생도 많아야 불사가 하루빨리 이뤄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독설과 파격. 언뜻 들어보면 물 위에 떠 있는 기름같은 ‘독불장군’ 아니면 괴짜’같다. 하지만 곰곰 들어보면 스님의 얘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고 원칙이다. 혹시나 입 바른 소리 하는 사람을 괴짜로 치는 세상이 잘못된 건 아닐까.
--- 경향신문 매거진X (02/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