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소득공제 오늘의책
사로잡힌 영혼

사로잡힌 영혼

: 한 문학 저널리스트의 사랑과 삶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저 / 정인수, 서유정 공역 | 빗살무늬 | 2002년 04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7.4 리뷰 5건
정가
24,900
판매가
22,410 (10% 할인)
구매 시 참고사항
eBook이 출간되면 알려드립니다. eBook 출간 알림 신청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2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533쪽 | 1057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95233337
ISBN10 899523333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독일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이다. 저자가 1988년에서 2001년까지 진행했던 TV 프로그램 <문학4중주>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독일에서 가장 성공한 문학관련 프로그램으로 평가된다. 그 최종회는 2001년 12월 14일 베를린의 대통령궁에서 진행될 정도였다.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그는 독일 방송의 여러 상, 이를테면, '밤비 Babi'와 '골든카메라'를 받았다. 동시에 최신작에 대한 비평서들을 출간하였는데, 귄터 그라스의 당시 신작소설 『광야(원제 : Ein Weites Feld)』를 찢어 버리는 합성사진을 채용한 슈피겔 표지는 전국적인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라니츠키는 유태인으로 1920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1929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하였으나 나치시절 다시 폴란드로 추방당하였다. 바르샤바 유태인 수용소에서 번역과 통역 일을 하였고, 유태인 투쟁기구에서 활동하였다. 그후 그는 수용소를 탈출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살해되었다. 전후 베를린 주재 폴란드 무관, 바르샤바 외무성, 런던 주재 폴란드 대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1959년 독일로 이주한 후 "FAZ", "Die Zeit" 등의 문예지에서 일하면서 문학비평가로서 활동한다. 1976년 하이네 메달을 수상함으로써 문학비평계의 중요 인물로 대중적인 인정을 받게된다. 그 후 Ricarda-Huch-Preis상(1981년), 년 토마스 만 상(1987), 바이에른 TV상(1991년) 등을 수상하며 독일 문학과 문학비평계에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99년 회고록인 본서 『사로잡힌 영혼 (원제:Mein Leben)』이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으며 해를 넘겨 2000년까지 53주간이나 연속으로 슈피겔 비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였다. 비평가이자 문학 저널리스트인 그는 이 책으로 독일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가 된 것이다.
역자 : 정인수, 서유정
정인수는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으며 현재 독일 본 대학교에서 음악학과 미술사 그리고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있다.

서유정은 한국 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독일 본 대학교에서 독문학 석사를 마쳤다. 현재는 「독일여성 작가들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있다.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우리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서로 상이했지만 둘 다 이를 타개하기엔 역부족이었고 현실을 버거워했다. 10분 전에 그녀는 자신에게 더 이상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0분 전에 아버지를 허리띠에서 풀어내려고 했던 여자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둘 다 열 아홉 살이었던 우리는 마찬가지로 속수무책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내게는 절망에 빠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눈물에 입을 맞추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잠시나마 그녀의 주의를 돌릴 요량으로 그녀가 로쉬에서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반 년 전에 아비투어를 치렀고, 파리에서 디자인과 미술사를 공부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 꿈은 전쟁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베를린에 머물던 몇 년 전에 나는 『트라우물루스 Traumulus』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었다. 세기말 직후에 아르노 홀츠와 오스카 예르쉬케 Oskar Jerschke가 공동 집필한 작품을 영화화한 것이었는데, 그 영화가 마음에 든 이유는 무엇보다도 주인공인 선생님 역을-그가 ‘트라우물루스’(옮긴이-트라움 Traum은 독일어로 꿈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에밀 야닝스가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끼던 학생이 자살하자 그 시체 옆에서-내가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우리가 할 일은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제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거창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예 입다물고 있는 것이나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상투적인 말보다는 더 나아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가 한 어처구니없는 행동에는 나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불과 10초 전만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생각도 할 수 없던 행동이었다. 나는 덥석 그녀를 붙잡고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녀는 움찔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몸이 뻣뻣해졌다. 고마워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튿날 토지아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유태인들이 땅에 묻히던 때였다. 아직까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첼란* Paul Celan의 시 「죽음의 푸가 Die Todesfuge」에도 나오듯 유태인들에겐 ‘공중 무덤’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유태인의 자살이란 것이 그리 흔치 않은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묘지에 모여들었다. 더구나 랑나스 씨는 고향에서 명망도 있고 평판도 좋은 사업가였던 것이다.

나는 토지아와 나란히 걸으며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묘혈 앞에서 나는 그녀 곁에 서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친구 중 한 사람이 뜻밖이란 듯, 이렇게 그녀에게 신경 써주는 젊은이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 사람은 우리 행동이 상황이나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침침하게 비가 내리던 1940년 1월, 우리가 같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 두 사람에겐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후로도 같이 있게 되었다.
--- pp. 174 ~ 175
아니다. 그는 쓸모 없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아니었다. 1958년 10월, 나는 이 젊은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알고이의 그로스홀츠로이테에서 열린 ‘47그룹’ 모임에서 귄터 그라스 그는 아직도 집필 중에 있던 소설 『양철북 Der Blechtrommel』 중 두 개의 장(章)을 낭독했다. 한스 베르너 리히터의 기억으로는 이 낭독회가 시작될 때부터 나는 열심히 메모를 했는데, 그라스의 소설이 처음 몇 문장 낭독되자 바로 메모하기를 그만뒀다고 한다. 그건 맞는 말이다. 이 두 장(章)은 내 맘에 들다 못해 나를 거의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나는 몇 주 후 뮌헨의 주간지 《디 쿨투어》에 실린 이 모임 보고서에도 그렇게 썼다-이 두 장(章)은 다음 해에 나온 완성된 소설보다도 훨씬 더 내 맘에 들었던 것이다. 이 소설 전체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으로, 지나치게 회의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평을 내렸다. 내가 그로스홀츠로이테에서 배웠던 사실은 작가들이 자신이 현재 쓰고 있는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할 때는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이야기에서는 얻을 만한 것이 그야말로 전혀 없다. 대단히 비범하고 독창적인 착상을 가지고 형편없는 책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말도 안 돼 보이는 모티브에서 뛰어난 소설이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자 그로스홀츠로이테에 모인 우리는 와인을 마시며 마주 앉았다. 누군가가 내게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했던 시기의 체험을 좀 이야기해달라고 청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그때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전쟁 중에 군인으로 있었으며, 이 중 몇 명은 모르긴 해도 폴란드에도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나는 특별히 부담 없는 일화를 골랐다. 나는 이 암울했던 시기에 세계 문학에서 소재를 얻어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던 나의 체험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이어서 그라스는 이 이야기를 써볼 계획은 없냐고 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말하자, 그는 이 모티브 중에서 몇 가지를 자신이 쓸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년이 지난 후인 1972년, 그는 『어느 달팽이의 일기 Tagebuch einer Schnecke』를 냈고, 여기에는 내가 체험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그는 이 체험 이야기를 ‘회의(懷疑)’라는 별명을 가진 어느 스승의 입을 통해 말하도록 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만났을 때, 나는 지나가는 말로 『어느 달팽이의 일기』에서 얻은 수입의 일부는 내 몫이라고 말했다. 그라스는 낯빛이 창백해지며,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한 개피에 불을 부쳤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재빨리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 대가로 그가 그린 삽화 중에 하나를 선물하면 나는 모든 권리를 영원히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의 가슴을 내리 눌렀던 돌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 제안에 동의했다. 게다가 내 맘에 드는 삽화를 내가 직접 골라야 된다고 하며, 이를 위해 토지아와 나를 베벨스플레트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손수 우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겠다는 것이었다. 1965년 여름(베를린의 독문학자인 발터 횔러러 Walter Holerer의 결혼식 때였다) 별 생각 없이 먹었던 그라스가 끓인 수프에 대한 기억이 나를 괴롭혔지만,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그때 먹은 수프는 역겨웠다. 또다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비평가라는 직업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 pp. 340 ~ 341
서독 여행을 위한 여권은 단수여권이었고, 체류 기간도 91일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독일 ‘입국비자’는 90일로 제한되어 있었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가야 했던 짐은 옷가지들을 담은 중간 크기의 가방 하나와 온갖 종류의 서류가 든 상당히 무거운 서류 가방 하나(여기에는 폴란드에서 출판된 나의 모든 글들이 다 들어 있었다), 책 몇 권 그리고 낡은 고물 타자기가 전부였다. 옴니아 메아 메쿰 포르토(Omnia mea mecum porto, 옮긴이-내가 지금 갖고 가는 것이 내 재산의 전부다). 그렇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거라곤 오로지 이 궁상맞은 짐꾸러미가 전부였다. 물론 현금도 있긴 했다. 서독 어느 은행에서도 받지 않는 500슬로티(옮긴이-폴란드의 화폐 단위). 가치가 없는 돈이었다. 그러나 그것말고도 약 20마르크 정도가 있긴 했다. 그 이상은 폴란드 중앙은행 외환부서에서 허용해 줄 수가 없었다.

폴란드 세관 검사는 무사히 잘 통과되었는데, 단지 여행용 타자기가 수상하게 보여 세밀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세관원들은 꼼꼼하게 내 여권에 이를 기재했다〔트리움프(옮긴이-‘승리’라는 뜻의 독일어) 상표라고〕. 그러나 모든 세관 조사가 다 끝나고 세관원들이 다 내린 후에도 기차는 출발하지 않는 것이다. 기차 칸에는 승객도 몇 명 없었고, 플랫폼은 텅 비어 있어서 스산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나를 기차에서 끌어내려 혹시 체포라도 한다면? 15분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정적은 점점 더 참기 힘들게 여겨졌다. 그러다가 갑자기-아무런 출발 신호나 그 어떤 소리 하나 없이-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기차가 정말로 출발하고 있는 것을 보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기차는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몇 분 후 또다시 짐 검사가 있었다. 이번에는 엄격한 두 명의 동독 여자 세관원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젠가 하이네가 프로이센의 국경 세관원들에게 했던 다음의 시구를 말할 수도 있었으리라.

가방을 뒤지는 바보들아!
여기서 아무것도 찾지 못할 거다!
나와 함께 여행하는 밀수품은,
내 머리 속에다 넣어두었다.

나에게서 찾아낼 만한 것은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문학이었다. 그것도 독일 문학이었다.
--- pp. 344 ~ 345
방문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브레히트는 커다란 쟁반이 놓여 있는 탁자 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쟁반 위에는 1952년 당시 바르샤바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오렌지, 바나나, 포도. 브레히트가 이 과일을 베를린에서 가져왔든지 아니면 동독대사관에서 가져다 놓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브레히트가 연극에 평생을 바친 것은 계급투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끊임없이 그는 계급투쟁에 몰두해 있었지만 그것은 아마도 자기 작품에 동력과 주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 변혁자로서의 브레히트가 연극과 문학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연극인이며 작가인 브레히트가 관념의 토대이자 목표로서 세계 변혁과 마르크시즘을 필요로 했던 것이리라.
--- pp.303-307
1987년 여름, 독일 제2방송(ZDF)에서 교양 있는 신사 두 명이 나를 방문했다. 디터 슈바르체나우와 오래 전부터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문예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요한네스 빌름스였다. 이들은 차와 소주를 마시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술기운에 용기를 냈을까? 시간이 많이 지난 후 그들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그것은 내가 ZDF를 위해서 정규 문학 방송을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거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하지만 그들은 일부러 내 대답을 못 들은 체했다. 반대로 그들은 내가 그런 방송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어떻게 갖고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이들이 체념해서 포기할 때까지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송은 매번 적어도 한 시간, 더 좋으면 75분짜리는 되어야 한다고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참가자는 나를 제외하고 세 명만 더 있으면 되고, 더 이상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나의 역할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즉, 토론 진행자이자 동시에 네 명의 토론자 중 한 사람의 기능이다. 이 두 신사는 태연하게 알겠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이제 불필요한 대화를 끝내려면 특별히 심한 공격을 가해야 했다. 방송 중에는 어떤 식의 영상이나 영화가 삽입되어서는 안 되며, 독일 가곡이나 샹송, 소설의 한 장면이라든지, 작가가 나와서 자기 작품을 낭독하거나 공원을 산책하면서 자기 작품에 대해서 좋게 설명하는 거라든지, 그 어떤 것도 끼여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화면에는 오로지 네 사람만 등장해야 하며, 이들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기대한 대로 논쟁도 하게 될 것이다. 텔레비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두 신사가 곤욕스러워했다는 것을. 왜냐하면 텔레비전의 최고의 성스러운 법은 끊임없이 시각성이 우위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이 법에 용감하게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호의적인 이 두 신사가 이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긴장하며 그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들의 얼굴이 창백해질까? 아니면 금방이라도 실신하게 될까? 그러나 사태는 달랐다. 슈바르체나우와 빌름스는 코로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소주를 한 잔 더 마시고 나지막이 단언했다. “좋습니다”
--- pp. 470 ~ 471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한국의 독자들에게는-독문학도라 할지라도-참으로 생소한 이 이름을 역자가 접하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Marcel Reich-Ranicki. 이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은 독일에 유학 온 후 어느 선배를 통해서였다. 선배는, 아니 독문학을 한다면서 어떻게 이 유명한 비평가를 모르느냐고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국에서 나름대로 독문학 관련 서적을 보며 공부를 했어도 이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느 날 텔레비전 방송에서 〈문학 사중주〉라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세 명의 고정 출연진과 매번 한 명의 게스트로 구성된 네 사람이 최근 독일에서 출간된 문학 작품을 각각 한 권씩 소개하면서 평을 하고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프로였다. 그 중 한 노인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하고 땅딸한 체구에 조명을 받아 더욱 번쩍이는 대머리, 이글거리는 커다란 아몬드형의 날카로운 두 눈, 커다랗고 길쭉한 귀, 잔뜩 찌푸린 인상. 이미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대단히 정력적인 요설가인 그가 한두 마디로 요약해서 작품평을 내리면 그야말로 카논이 되는 듯한, 굉장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첫인상이 그랬다. 바로 그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였던 것이다. 그 후로 독일에서는 이 사람을 흔히 ‘문학의 제왕’이라고 일컫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의 문학 비평은 한국과는 달리 신문 문예란이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의 주요 신문에는 ‘푀예통(Feuilleton)’이라는 신문 문예란이 있어 문학을 비롯한 각종 문화 활동을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난에 실리는 신간이나 초연 등에 대한 비평은 그 영향력이 상당하다. 라니츠키가 ‘문학의 제왕’이라는 비평가의 명성을 얻은 것도 ‘푀예통’을 통해서다. 라니츠키는 문학비평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 문학비평이라는 장르의 발생은 서구 시민 계급이 대두되면서 신문이 번성하게 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역사적 배경을 끄집어낸다. 서적 판매업자나 출판사가 신문에 게재하던 책 광고가 장문의 비평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비평은 근대 언론의 한 현상이지, 문학의 한 현상은 아니라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평의 용도는 작가를 위한 것이 절대 아니라 순전히 독자를 위한 것이라고 그는 역설한다. 비평은 독자로 하여금 문학작품에 흥미를 갖도록 해야 하며, 비평에서 다른 것은 다 허용될 수 있어도 독자를 지루하게 하는 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라니츠키는 비평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과거 탁월했던 독일 작가들이자 문학비평가들이었던 레싱, 프리드리히 슐레겔, 노발리스, 하이네, 폰타네 등과 연결시킨다. 그들도 신문에다 비평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저널리즘을 통하여 문학을 대중화하려는 자신의 시도가 그들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독자 지향적인 그의 비평관은 무엇보다도 문체를 통해 실현된다. 그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글쓰기의 대원칙은 간결, 단순, 명료, 평이함, 신랄함이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 재미와 오락을 아주 중요시 여기는 것도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독자를 지루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을 두고 고심해야 할 사람은 작가들이지 독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글이 활기에 넘치고 빠른 호흡으로 몰아가듯 진행되는 것은 이와 같은 문예 저널리즘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독자 지향적인 그의 문학·비평관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육적인 데에 관심이 있다. 그는 대중에게로 내려가면서 문학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소수 엘리트들만 누리던 문학으로 대중을 끌어올려 그들도 이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그는 문학을 민주화 시켰다”, 또는 그의 비평은 “가장 교양 있는 형태의 시끄러운 저널리즘”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많은 ‘적’들에 의해 그 문체의 피상성, 상투성, 문학 형식보다는 내용에만 천착한다는 등의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는 “현재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 비평가”로 공인되고 있다.

그가 폴란드를 떠나 독일에 정착하면서 문학 비평가가 되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신문에 자신의 비평을 싣는 거였다. 1958년 독일로 돌아온 그는 그후 2년이 지난 1960년부터 1973년까지 주간 신문 《디 차이트》의 고정 비평가로 일했고, 1973년부터 1988년까지는 일간신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문학 및 문학계 편집부’를 맡아 일했다. 이 직책이 독일 문학계에서 갖는 권력 내지는 권위는 대단한 것이다. 어느새 그는 ‘문학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1988년부터 지난해인 2001년 말까지 방송된 텔레비전 프로 〈문학 사중주〉를 통해서 그야말로 바라던 훨씬 더 대중적인 영향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가 신문지상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대중 매체를 통해 문학을 전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1964년부터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었던 〈문학 카페〉라는 프로가 그것이다. 이는 지금은 없어진 하노버의 한 포도주 술집에서 진행되었고, 작년에 타계한 독일의 주요 문학 비평가였던 한스 마이어와 함께 진행했으며, 매번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주요인물들을 게스트로 초청하여 다양한 주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문학 사중주〉 끝에 사용한 브레히트 작품에서 뽑은 유명한 구절 “막은 내리고 모든 질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이 프로에서 이미 사용된 것이다.

〈문학 사중주〉에서는 기성 작가들의 신간은 물론이고 번역된 외국문학 소개 및 신출내기 작가들의 작품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개되고 논의를 거친 책들은 당장에 서점가에 진열되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서점에는 〈문학 사중주〉에서 소개된 책을 진열하는 진열대가 따로 배치되었고, 심지어는 방송이 채 나가기도 전에 이미 선정된 작품들이 서점가에 나타나기도 했다. 어느덧 지난 해 12월 방송을 끝으로 13년간의 〈문학 사중주〉가 끝났다. 마지막 방송은 독일 대통령 요한네스 라우의 베를린 공식 관저인 벨레뷔 성(城)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2월부터는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친 주제를 가지고 매년 9차레씩 〈라이히-라니츠키 솔로〉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독무대를 장식하게 되었다.

혹자는 이러한 그의 모습에 대해 “독일 문학계의 쇼기획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조차도 굉장한 찬사가 아니겠냐고 해석되기도 한다. 바로 이와 같은 “쇼기획자”가 독일에는 아주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독일 문학계에서는 문학을 능란하게 대중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든가 비술(秘術)적인 문학가들의 세계와 독자를 매개해 줄 열정을 가진 사람이 정말로 부족하다는 거다. 이제까지 독일에서 문학비평의 이미지는 딱딱하고 어렵고 수식어가 많은 장황한 문체로 인해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어느 비평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독일 문학을 위해 라니츠키보다 많은 일을 한 사람은 없다고 평가한다. 한편, 이와 같은 그의 위상과 때로는 독설적이며 칼로 자르듯 단호한 그의 비평 방식은 많은 동조자뿐만 아니라 많은 ‘적’도 만들어 냈다. 대표적인 예로 귄터 그라스나 마틴 발저, 페터 한트케와 같은 작가들은 자주 그의 공격을 받는 작가들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신랄한 혹평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또한 작가들에게는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이용되었다. 정말이지 불행한 것은 호평도 혹평도 받지 못하고 그의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는 경우라고 하는 말을 봐도 그의 독일 문학계에서의 막강한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겠다.

회원리뷰 (5건) 회원리뷰 이동

한줄평 (0건) 한줄평 이동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무료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품절 상태입니다.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