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서로 상이했지만 둘 다 이를 타개하기엔 역부족이었고 현실을 버거워했다. 10분 전에 그녀는 자신에게 더 이상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0분 전에 아버지를 허리띠에서 풀어내려고 했던 여자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둘 다 열 아홉 살이었던 우리는 마찬가지로 속수무책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내게는 절망에 빠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눈물에 입을 맞추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잠시나마 그녀의 주의를 돌릴 요량으로 그녀가 로쉬에서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반 년 전에 아비투어를 치렀고, 파리에서 디자인과 미술사를 공부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 꿈은 전쟁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베를린에 머물던 몇 년 전에 나는 『트라우물루스 Traumulus』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었다. 세기말 직후에 아르노 홀츠와 오스카 예르쉬케 Oskar Jerschke가 공동 집필한 작품을 영화화한 것이었는데, 그 영화가 마음에 든 이유는 무엇보다도 주인공인 선생님 역을-그가 ‘트라우물루스’(옮긴이-트라움 Traum은 독일어로 꿈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에밀 야닝스가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끼던 학생이 자살하자 그 시체 옆에서-내가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우리가 할 일은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제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거창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예 입다물고 있는 것이나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상투적인 말보다는 더 나아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내가 한 어처구니없는 행동에는 나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불과 10초 전만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생각도 할 수 없던 행동이었다. 나는 덥석 그녀를 붙잡고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녀는 움찔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몸이 뻣뻣해졌다. 고마워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이튿날 토지아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유태인들이 땅에 묻히던 때였다. 아직까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첼란* Paul Celan의 시 「죽음의 푸가 Die Todesfuge」에도 나오듯 유태인들에겐 ‘공중 무덤’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유태인의 자살이란 것이 그리 흔치 않은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묘지에 모여들었다. 더구나 랑나스 씨는 고향에서 명망도 있고 평판도 좋은 사업가였던 것이다.
나는 토지아와 나란히 걸으며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묘혈 앞에서 나는 그녀 곁에 서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친구 중 한 사람이 뜻밖이란 듯, 이렇게 그녀에게 신경 써주는 젊은이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 사람은 우리 행동이 상황이나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침침하게 비가 내리던 1940년 1월, 우리가 같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 두 사람에겐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이후로도 같이 있게 되었다.
--- pp. 174 ~ 175
아니다. 그는 쓸모 없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아니었다. 1958년 10월, 나는 이 젊은이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알고이의 그로스홀츠로이테에서 열린 ‘47그룹’ 모임에서 귄터 그라스 그는 아직도 집필 중에 있던 소설 『양철북 Der Blechtrommel』 중 두 개의 장(章)을 낭독했다. 한스 베르너 리히터의 기억으로는 이 낭독회가 시작될 때부터 나는 열심히 메모를 했는데, 그라스의 소설이 처음 몇 문장 낭독되자 바로 메모하기를 그만뒀다고 한다. 그건 맞는 말이다. 이 두 장(章)은 내 맘에 들다 못해 나를 거의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나는 몇 주 후 뮌헨의 주간지 《디 쿨투어》에 실린 이 모임 보고서에도 그렇게 썼다-이 두 장(章)은 다음 해에 나온 완성된 소설보다도 훨씬 더 내 맘에 들었던 것이다. 이 소설 전체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으로, 지나치게 회의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평을 내렸다. 내가 그로스홀츠로이테에서 배웠던 사실은 작가들이 자신이 현재 쓰고 있는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할 때는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이야기에서는 얻을 만한 것이 그야말로 전혀 없다. 대단히 비범하고 독창적인 착상을 가지고 형편없는 책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말도 안 돼 보이는 모티브에서 뛰어난 소설이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자 그로스홀츠로이테에 모인 우리는 와인을 마시며 마주 앉았다. 누군가가 내게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했던 시기의 체험을 좀 이야기해달라고 청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그때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전쟁 중에 군인으로 있었으며, 이 중 몇 명은 모르긴 해도 폴란드에도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나는 특별히 부담 없는 일화를 골랐다. 나는 이 암울했던 시기에 세계 문학에서 소재를 얻어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던 나의 체험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이어서 그라스는 이 이야기를 써볼 계획은 없냐고 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말하자, 그는 이 모티브 중에서 몇 가지를 자신이 쓸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년이 지난 후인 1972년, 그는 『어느 달팽이의 일기 Tagebuch einer Schnecke』를 냈고, 여기에는 내가 체험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그는 이 체험 이야기를 ‘회의(懷疑)’라는 별명을 가진 어느 스승의 입을 통해 말하도록 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만났을 때, 나는 지나가는 말로 『어느 달팽이의 일기』에서 얻은 수입의 일부는 내 몫이라고 말했다. 그라스는 낯빛이 창백해지며,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한 개피에 불을 부쳤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재빨리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 대가로 그가 그린 삽화 중에 하나를 선물하면 나는 모든 권리를 영원히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의 가슴을 내리 눌렀던 돌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 제안에 동의했다. 게다가 내 맘에 드는 삽화를 내가 직접 골라야 된다고 하며, 이를 위해 토지아와 나를 베벨스플레트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손수 우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겠다는 것이었다. 1965년 여름(베를린의 독문학자인 발터 횔러러 Walter Holerer의 결혼식 때였다) 별 생각 없이 먹었던 그라스가 끓인 수프에 대한 기억이 나를 괴롭혔지만,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그때 먹은 수프는 역겨웠다. 또다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비평가라는 직업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 pp. 340 ~ 341
서독 여행을 위한 여권은 단수여권이었고, 체류 기간도 91일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독일 ‘입국비자’는 90일로 제한되어 있었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가야 했던 짐은 옷가지들을 담은 중간 크기의 가방 하나와 온갖 종류의 서류가 든 상당히 무거운 서류 가방 하나(여기에는 폴란드에서 출판된 나의 모든 글들이 다 들어 있었다), 책 몇 권 그리고 낡은 고물 타자기가 전부였다. 옴니아 메아 메쿰 포르토(Omnia mea mecum porto, 옮긴이-내가 지금 갖고 가는 것이 내 재산의 전부다). 그렇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거라곤 오로지 이 궁상맞은 짐꾸러미가 전부였다. 물론 현금도 있긴 했다. 서독 어느 은행에서도 받지 않는 500슬로티(옮긴이-폴란드의 화폐 단위). 가치가 없는 돈이었다. 그러나 그것말고도 약 20마르크 정도가 있긴 했다. 그 이상은 폴란드 중앙은행 외환부서에서 허용해 줄 수가 없었다.
폴란드 세관 검사는 무사히 잘 통과되었는데, 단지 여행용 타자기가 수상하게 보여 세밀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세관원들은 꼼꼼하게 내 여권에 이를 기재했다〔트리움프(옮긴이-‘승리’라는 뜻의 독일어) 상표라고〕. 그러나 모든 세관 조사가 다 끝나고 세관원들이 다 내린 후에도 기차는 출발하지 않는 것이다. 기차 칸에는 승객도 몇 명 없었고, 플랫폼은 텅 비어 있어서 스산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나를 기차에서 끌어내려 혹시 체포라도 한다면? 15분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정적은 점점 더 참기 힘들게 여겨졌다. 그러다가 갑자기-아무런 출발 신호나 그 어떤 소리 하나 없이-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기차가 정말로 출발하고 있는 것을 보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기차는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몇 분 후 또다시 짐 검사가 있었다. 이번에는 엄격한 두 명의 동독 여자 세관원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젠가 하이네가 프로이센의 국경 세관원들에게 했던 다음의 시구를 말할 수도 있었으리라.
가방을 뒤지는 바보들아!
여기서 아무것도 찾지 못할 거다!
나와 함께 여행하는 밀수품은,
내 머리 속에다 넣어두었다.
나에게서 찾아낼 만한 것은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문학이었다. 그것도 독일 문학이었다.
--- pp. 344 ~ 345
방문을 들어서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브레히트는 커다란 쟁반이 놓여 있는 탁자 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쟁반 위에는 1952년 당시 바르샤바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오렌지, 바나나, 포도. 브레히트가 이 과일을 베를린에서 가져왔든지 아니면 동독대사관에서 가져다 놓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브레히트가 연극에 평생을 바친 것은 계급투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끊임없이 그는 계급투쟁에 몰두해 있었지만 그것은 아마도 자기 작품에 동력과 주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 변혁자로서의 브레히트가 연극과 문학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연극인이며 작가인 브레히트가 관념의 토대이자 목표로서 세계 변혁과 마르크시즘을 필요로 했던 것이리라.
--- pp.303-307
1987년 여름, 독일 제2방송(ZDF)에서 교양 있는 신사 두 명이 나를 방문했다. 디터 슈바르체나우와 오래 전부터 《쥐트도이체 차이퉁》의 문예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요한네스 빌름스였다. 이들은 차와 소주를 마시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술기운에 용기를 냈을까? 시간이 많이 지난 후 그들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그것은 내가 ZDF를 위해서 정규 문학 방송을 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거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하지만 그들은 일부러 내 대답을 못 들은 체했다. 반대로 그들은 내가 그런 방송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어떻게 갖고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나는 이들이 체념해서 포기할 때까지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송은 매번 적어도 한 시간, 더 좋으면 75분짜리는 되어야 한다고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참가자는 나를 제외하고 세 명만 더 있으면 되고, 더 이상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나의 역할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즉, 토론 진행자이자 동시에 네 명의 토론자 중 한 사람의 기능이다. 이 두 신사는 태연하게 알겠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이제 불필요한 대화를 끝내려면 특별히 심한 공격을 가해야 했다. 방송 중에는 어떤 식의 영상이나 영화가 삽입되어서는 안 되며, 독일 가곡이나 샹송, 소설의 한 장면이라든지, 작가가 나와서 자기 작품을 낭독하거나 공원을 산책하면서 자기 작품에 대해서 좋게 설명하는 거라든지, 그 어떤 것도 끼여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화면에는 오로지 네 사람만 등장해야 하며, 이들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기대한 대로 논쟁도 하게 될 것이다. 텔레비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두 신사가 곤욕스러워했다는 것을. 왜냐하면 텔레비전의 최고의 성스러운 법은 끊임없이 시각성이 우위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이 법에 용감하게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호의적인 이 두 신사가 이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긴장하며 그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들의 얼굴이 창백해질까? 아니면 금방이라도 실신하게 될까? 그러나 사태는 달랐다. 슈바르체나우와 빌름스는 코로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소주를 한 잔 더 마시고 나지막이 단언했다. “좋습니다”
--- pp. 470 ~ 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