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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의 역사 1

미국인의 역사 1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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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4월 3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852쪽 | 1291g | 156*233*45mm
ISBN13 9788952273604
ISBN10 8952273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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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역자 : 명병훈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했다.[중앙일보] [경향신문] 등에서 일했다. 현재 인문학을 기반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지식과 열정을 불어넣는 출판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폴 존슨의 『근대의 탄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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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12월 11일, 훗날 매사추세츠가 되는 뉴플리머스에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최초의 개척민이 상륙했다. 앞선 개척민은 젠틀맨 출신의 모험가,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사람, 계약하인 등이었는데, 이들은 신대륙에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출세하겠다는 공통된 욕구로 단결했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공평과 자유라는 경험에 바탕을 둔 영국의 뿌리 깊은 전통에 따라, 관습법을 공정하게 적용하고, 공통의 이익을 위해 분별 있는 통치를 시행하며, 공동사회 전체의 요구에 따라 법을 제정하고자 했다. 이처럼 그들과 그 자손은 미국의 주요 전통 가운데 한 가지 요소를 형성했다.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 모두에서 실용적이고 절도 있고 창조적인, 어떤 경우에나 유효한 그런 요소를.
메이플라워 호의 남자-와 여자-들은 전혀 달랐다. 그들이 아메리카에 온 것은 돈벌이나 심지어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둘 다를 신의 은총으로 감사히 받아들였지만 그보다는 우선 지상에 신의 나라를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광신자, 이상주의자, 유토피아 추구자, 성직자였으며,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아니 어쩌면 과격하다고 해야 할-사람들은 열광적이고 타협을 모르며 독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또한 매우 정력적이고 끈질기며 용감했다. 그들과 그 자손은 미국의 주요 전통 가운데 또 한 가지 요소를 형성했다. 역시 창조적이지만, 관념적이고 이지적이며, 쉽게 발끈하고 고집스러우며, 때로는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만큼 지독히 비타협적인 요소를. 앞으로 살펴보면서 익히 알게 되겠지만, 이 두 가지 전통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그리고 서로 충돌했다. 어떤 때는 건설적으로 때로 엄청난 창조력을 발휘했으나 어떤 때는 사화와 국가에 위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 pp.65-66

하지만 새로운 지리적 일체감 이상으로 중요한 사실은 의식의 변화였다. 한참 뒤 일이지만,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은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일어났다. 혁명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있었다. 자신들의 의무와 은혜에 대해 종교적인 감정이 변화하고 있었다.” 계몽운동에 의해 촉발된 미국인 엘리트의 합리주의와 대중 사이에서 싹튼 대각성의 정신이 하나가 되어, 혁명이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향하는 여론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었다. 혁명은 마침내 찾아올 종말의 사건과 동일시되었다. 어느 쪽 힘도 다른 한쪽이 없었으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종교적 배경 없이는 혁명은 일어날 수 없었다.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본질적인 차이는 미국혁명이 발단에서 종교적 사건이었던 데 비해 프랑스 혁명은 반종교적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이 미국혁명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형성하고, 그에 따라 생겨난 독립국가의 성격을 결정했다. --- pp.192-193

독립선언은 몇 세대에 걸친 최고의 휘그 사상을 힘차고 훌륭하고 간결하게 요약했다.
무엇보다 그 첫 부분이 충격적이었다. 머리말 두 문단은 더 이상 손댈 여지가 없다고 여겨졌다. 첫 문단에서 우선 비통한 어조로 영국과의 연합을 해소하는 슬픔을 언급하고, 그 이유를 들면서 “인류의 신념에 대한 엄중한 고려”가 요청된다고 말했다. 두 번째 문단은 앞 문단에 이어 전체 핵심을 이루었다-“우리는 이 자명한 진리를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창조주로부터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를 주장할,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정부는 거기에 속한 사람들의 동의를 통해 구성되어야 하며, 이러한 모든 목적에 정부가 부합하지 않을 때 정부의 형태를 바꾸거나 폐지하고, 또 이 원칙에 입각해 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만들 권리가 시민에게 있다.” 이 문장에 이어지는 내용은 어떤 독자라도-조지 3세조차-읽지 않을 수 없었다. --- pp.249-250

대개의 “해방전쟁” 사례가 언제나 그렇듯이 미국 독립전쟁 역시 마찬가지로 참혹한 내전이었다. 오늘날 연구에 따르면 그 당시 미국인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고 추정한다. 애국주의자가 3분의 1, 국왕 지지자가 3분의 1, 나머지는 관망주의자로서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에 가담했다. 하지만 전쟁에 적극 관여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국민의 절반을 훨씬 넘게 차지했다고 간주된다. 전투적인 세력 또한 거의 둘(애국주의자와 국왕 지지자)로 갈라졌다. 국왕 지지자는 그 성격상 지도자가 없었으며 해방주의자를 몰아세우는 과격성도 없었다. 영국의 지도력을 기대했지만 성과는 별로 없어서 국왕 지지자는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다. 현실적으로 모든 것-직업, 집, 토지, 저축, 때로는 자신의 목숨마저-을 잃었다. 영원히 혈연을 끊은 가족도 있었는데 프랭클린 가의 비극이 대표적인 예였다. --- p.274

앞서 살펴보았듯이 미국은 우선 종교적인 목적으로 건국되었고, 신앙 대각성운동이 초창기의 원동력이었다. 미국인은 이전 지배자인 영국인에 비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필그림 파더스는 진정으로 영국인이 부도덕하고 신앙심을 잃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와 “언덕 위의 도시”를 세웠다. 그 후손은 다시 독립과 자유를 선택했는데, 그것은 종속된 상태 자체가 도덕과 신앙에 어긋나며 신의 섭리를 거스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립선언서]는 서명한 사람들에게는 세속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문서였으며, 혁명전쟁이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 미국인은 신의 보살핌 아래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고, 신의 은총으로 정부 형태를 만들었다. 이것은 17세기에 이주민들이 자신들 곁에서 신이 지켜보고 있음을 느끼면서 계약서, 헌장, 규약, 증서 등을 작성한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이런 미국 역사의 초기 문서와 달리 합중국 헌법에는 종교에 관한 합의나 체계 형성 과정이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헌법에서 유일하게 종교를 언급한 부분은 제6조 3항이었다. “어떤 공직이든 그 자격으로서” “종교상의 심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 전부였고, 신과 관련이 있는 것은 마지막에 있는 날짜 “그리스도 기원 1787년”뿐이었다. 심지어 끔찍이 반종교적인 영국에서조차 국교가 있어서 국왕은 종교 의식 절차에 따라 대관식을 거행했고, 의회는 날마다 기도와 함께 개회했다. 미국 헌법이 처음으로 실질적으로 종교를 언급한 부분은 수정 조항 제1조로서 국교를 거부하고 연방의회에 “국교의 수립을 규정하고 신앙의 자유로운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의 제정을 금지했다.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설명할까? --- p.325

이주민이 몰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뱃삯이 점점 싸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때때로 기근으로 발전한 식량 부족을 들 수 있다. 1816년의 기상 악화, 1825~1826년, 1826~1827년, 1829~1830년의 혹독한 겨울, 특히 마지막으로 든 해 겨울의 기록적인 한파는 사람들을 굶주림에 빠뜨렸다. 토머스 맬서스가 주장한 인구가 파국으로 이끈다는 이론이 매우 왜곡된 형태로 서민층에 침투해, 사람들은 대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가족을 데리고 유럽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게다가 무거운 세금 문제도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말기에 유럽 대륙 전체가 세 부담으로 신음했다. 영국에서는 1816년 의회의 반란으로 소득세가 폐지되고, 1820년대에는 관세도 서서히 경감되었다. 하지만 유럽 대륙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국가는 가난한 농민이나 상인에게 재정 부담을 지웠다. 국내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관세 장벽을 설치해 국경을 넘는 거의 모든 물품에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이에 비하면 미국은 마치 천국과 같았다. 군대는 프로이센의 50분의 1 규모였고, 국민 1인당 국가에 내는 비용은 영국의 1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 영국 국세 규모조차 유럽 기준에서 본다면 비교적 작은 편에 속했다. 미국에는 주립 교회 등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구세마저 없었다. 또한 구빈세를 징수하지도 않았다-처음부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말 8필을 소유한 농가가 내는 세금은 1년에 고작 12달러로 유럽 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금액이었다. 미국에서는 임금이 높았을 뿐 아니라 그 수입을 오롯이 가족을 위해 쓸 수 있었다. 혜택을 받은 점은 이 밖에도 여럿 있었다. 징병제가 없었고, 정치 경찰과 검열이 존재하지 않았다. 법에 따라 계층을 구별하지도 않았다. 고용주 대부분은 종업원과 함께 식사했다. (노예를 제외하고) 누구도 “주인님” 따위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자리 잡은 이주민이 모국에 보낸 편지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낭독되어 대서양 횡단선의 승객을 모집하는 데 훌륭한 선전이 되었다. 재미있게도 대통령이 의회에서 행한 연두 연설조차 검열관이 금지 조치를 내리기까지는 유럽의 많은 신문에 게재되어 이민 모집에 일역을 담담했다. 「더블린 모닝포스트」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우리는 이 기사를 직접 자신의 생활과 관계가 있는 듯이 읽는다.”
하지만 가장 큰 매력은 값싼 토지였다. 유럽에서 온 이주민은 특히 호주나 아르헨티나에서 원주민의 예전 사냥터에 속한 토지를 값싸게 양도받을 수 있었는데, 그 점에서 가장 흡인력이 있는 곳은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정부는 성가심을 무릅쓰고 가난한 사람들이 토지를 확보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합중국 역사를 통해 이 시기의 토지 구입 제도만큼 자선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기본인 된 정책은 1796년 토지 가격을 1에이커당 2달러로 규정한 조례였는데, 총액의 절반을 지불하고 나머지 대금은 1년 뒤에 갚으면 되었다. 1800년 법령에 따라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 치리코시, 매리에타, 스투벤빌 등 프런티어 최전선에 연방 토지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구입의 최저 단위는 640에이커에서 320에이커로 낮아졌고, 구입자는 선금으로 25퍼센트를 처음에 지불하고 잔금은 그 뒤 4년 안에 갚으면 되었다. 따라서 많은 농장-유럽의 기준에서 보면 터무니없이 넓은 농장-을 불과 160달러 정도의 현금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 pp.452~454

이전의 내각은 합중국 전반에 걸친 이익을 대표하도록 구성되었고, 그 멤버들은 지배계급의 단면이었다(물론 미국에 그런 계급이 존재하는 한)-즉 그들은 젠틀맨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대해 키친 캐비닛은 언론인과 같이 여태껏 권력하고는 아무런 인연이 없던 사람들을 권력 행사 그룹에 끌어들였다. 켄들은 워싱턴 사교계를 런던이나 파리를 흉내 낸다며 경멸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늦은 만찬”은 “영국의 우스꽝스러운 풍습”이며, 위스키 대신에 샴페인을 마시는 것은 “주제넘은 행위”에 불과하고, 노출이 심한 드레스는 “역겨웠다.”
켄들 같은 인물이 미국을 통치하는 데 일조를 한다는 생각만으로 애덤스 등은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잭슨은 대중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하여 이제는 대중이 여물통에 코를 내미는 형국이었다. 잭슨은 한두 가지 예외는 있었으나 남북전쟁 시대까지 계속된 새로운 정치 왕조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권력 구조를 영구히 변화시켰다. 키친 캐비닛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여 오늘날과 같은 백악관의 거대관료제와 관련 기관이 생겨났다. 이것은 4년마다 치러지는 대통령과 유권자의 개인적인 계약에 의해 조성된 대통령의 권력 강화 산물이었다. 켄들과 같은 인물이 이런 새로운 방식의 상징이 된 것은 나름대로 타당했다. 그리고 잭슨이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계약에 서명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한다면, 신문은 그 계약을 작성하는 수단으로서 일조를 한 셈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통치만 잘된다면 그게 정식 내각이건 키친 캐비닛이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잭슨 시대에는 확실히 사정이 좋았다. 경제가 확대되고 붐을 이루었다. 그 결과 간접세와 토지 매각 수입이 급증해 연방정부의 얼마 안 되는 경비는 어렵지 않게 지출될 수 있었다. 국채도 감소하여 1835년과 1836년에는 채무액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것은 근대 국가가 된 이래 그 전이나 앞으로나 예외가 없었다. 이 검소하고 간소하며, 허식도, 대국과 같은 가식도 없는 대중 정부는 의심할 나위 없이 유권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 pp.539-540

그 이듬해 봄이 되자 전 세계로부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1830년대에 이미 금광 열풍으로 들끓었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캘리포니아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메인 주 커틀러 주민들은 직접 배를 만들어 돛을 달고 혼 곶을 돌아 샌프란시스코 만에 도착했다. 파나마 지협을 거쳐 온 사람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오리건 트레일과 캘리포니아 트레일을 따라 로키 산맥을 넘어 왔다. 초기의 “49년도 사람들”은 철망-그들이 “패닝”(접시로 이는 방법-옮긴이)이나 “플래서”(상자로 거르는 방법)라고 부른 사금 채취법-을 사용해 자갈과 흙을 걸러 금을 채취했다. 또는 “사금을 이는 긴 홈통”이나 세광 홈을 사용해 흐르는 물에서 금을 걸러내기도 했다. 이는 매우 간단한 작업으로 다음과 같은 속요도 생겨났다. “아아 / 캘리포니아 / 나의 땅 / 나 새크라멘토를 향해 떠나네 / 무릎에 세숫대야 올려놓고.”
하지만 지표면의 채굴이 끝나자 수직갱을 설치하고 분쇄기를 이용해 석영에 박힌 금을 채취해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자본과 조직이 필요했다. 실망한 49년도 사람들 대부분은 빈털터리가 된 채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그 수는 한 해에 3만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는 황금 이외에 다양한 기회가 널렸기 때문에 그대로 정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인디언을 제외하고 금광 발견 이전부터 이곳에 살던 사람의 숫자는 1만 4,000명이 채 안 되었다. 하지만 1852년에는 25만 명이 넘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도박꾼, 금융업자, 매춘부와 억센 여성, 배우와 통신원, 정치 신인과 사업가 등이 모여들어 인구 2만 5,000명이 들끓는 번창한 도시로 변했다. 최선에서든 최악에서든 모두가 자기 이익만을 위해 싸우는 무한경쟁 사회였다. --- pp.601-602

이처럼 스스로 자문자답을 되풀이하면서 링컨은 미국의 종교 체험이 형성해낸 국가적이고 공화적이며 민주적인 도덕관-아마 특정 교회에 몸담은 이보다 더 완전하고 정확한 도덕관-을 몸소 보여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워싱턴 대통령이 의회에서 퇴임 연설을 할 때와 똑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과 전쟁 중에 그가 보여준 행동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그 당시에 이미-국가 이념과 매우 정확하게 일치하는 듯이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윈스럽 총독이나 최초의 정착민들과는 달리 링컨은 미국이라는 공화국이 “선택받은 국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 나라가 “언제나 정의롭다”라는 것을 암시했는데, 남북전쟁이 일어난 것 자체가 미국에도 잘못이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하지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정의를 실천하려는 의지 역시 있었다. 링컨은 미국인은 “거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남북전쟁은 신의 계획의 일부로서 피 흘리는 쓰라린 고통으로 사람들을 시험하는 커다란 시련이지만, 그 뒤부터는 자선과 재탄생의 길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 p.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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