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화 정책이 가져온 결과 가운데 하나는 이슬람 제국의 중심 사회에서 측량, 유산 분배, 세금 계산 및 징수, 군인과 관료의 봉급 관리 등과 같은 다양한 직무의 범위 내에서 구전口傳을 통해 유지되어온 고대 지식이 상당히 빠르게 아랍화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같은 ‘법령에 의한’ 아랍화가 저항을 불러오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당시 아랍화 정책은 이후 대규모로 이루어진 작업, 즉 그리스어와 인도어로 된 과학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의 준비 과정이 되었다. 학술적 지식의 아랍화는 고대 지식에 대해 일종의 독점권을 가지고서 자신의 모국어로 그 지식을 이용했던 이들이 직접 장려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 p.13
7세기 중반부터 8세기 말까지, 다시 말해 이슬람 제국이 세워지고 처음 150년 동안 아랍 사회에서 실제 사용된 수학은 주로 일상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게 해주는 기하학적·산술적 지식에 관련된 것이었다. 가령 기하학은 측량과 건축, 실내장식 분야에 활용되었다. 이 분야들에서는 평면과 입체 도형을 사용하고, 직선이나 곡선의 길이를 재고, 넓이와 부피를 정확하게든 대략적으로든 계산해야 하니까 말이다. 또한 기하학 지식은 주어진 도형에서 출발해 새로운 도형을 재구성하거나 일정한 비율에 따라 면적을 분할하는 등 예술적인 목적에서 기하학적 형태의 물건을 만들 때도 동원되었다. --- p.25
점성술의 경우 8세기에 천문학적 활동과의 연계 속에서 진정한 아랍의 것이라고 할 만한 전통이 발전되었는데, 여기에는 특히 아바스 왕조 칼리프들의 추진과 국가의 보수를 받는 공식 점성가들의 역할이 특히 컸다. 실제로 알만수르는 762년에 바그다드를 새 수도로 선택할 때 공식 점성가들한테 의견을 구할 정도였고, 하룬 아르라시드 역시 알파들 이븐사흘al-Fadl Ibn Sahl 같은 유명한 점성가들을 데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천문학자로서 점성술 책을 펴낸 사람으로는 알파 자리와 야쿱 이븐 타리크를 들 수 있다. --- p.65
아랍 과학 전통에서 지리학은 기술지리학descriptive geography, 여행기, 지도학cartography이라는 서로 다른 세 분야를 포함한다. 기술지리학과 여행기는 오늘날 인문지리학이라고 불리는 분야와 관계가 있는데, 어떤 지역의 주민과 이들의 생활 방식, 주거 형태, 경제 활동, 신앙 등에 관해 수집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학은 앞의 두 분야보다는 과학기술적인 성질이 큰 분야로, 9세기에 번역된 그리스 문헌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거리 계산, 육상과 해상에서의 방향 파악, 위도와 경도 측정 그리고 이 정보들을 사용해 여러 유형의 지도를 제작하는 것이 지도학의 목적이다. --- p.85
책을 통해서나 교육을 받아 배우는 형태의 의학은 우마이야 왕조 초기부터 칼리프들이 곁에 둔 당대의 뛰어난 의사들을 중심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가 다마스쿠스였기 때문에 최초로 의사직에 오른 사람들은 그리스어나 시리아어로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다 아바스 왕조에 들어 군데샤푸르에서 교육 받은 페르시아 출신 의사들이 등장하면서 말하자면 카드 패의 재분배가 이루어진다. --- p.99
화학은 고대부터 17세기까지 크게 두 가지 형태의 활동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는 ‘화학’이라는 이름을 유지한 것으로, 여러 물질의 성분을 분석하고 기존 물질들을 변형하거나 조합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활동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연금술’이라고 불린 것으로, 일부 화학 지식에 관계된 철학적·비의적秘義的 측면과 특히 평범한 금속을 금으로 변환하는 방법 그리고 만병통치약과 이른바 ‘묘약’을 만들기 위한 복잡한 실험에 주로 연관된 것이었다. --- p.111
군사기술을 다룬 책들은 무엇보다 먼저 무슬림 정권의 관심을 끌었으며, 우마이야 왕조 때부터 칼리프들은 ‘전쟁 기술’에 관한 개론서를 손에 넣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 지식의 대부분은 당연히 비밀로 유지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슬람 제국 처음 몇 세기 동안 해당 주제에 관한 문헌이 나오지 않은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 분야에서 현재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책들은 12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들을 보면 크게 세 가지 주제가 드러나는데, 첫 번째는 기병 전술, 즉 말을 이용한 싸움과 전투 대형에 관한 것이다. --- p.132
천문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아랍의 점성술은 수많은 번역서가 증명하듯 유럽에서 천문학에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아랍 점성술 서적에 대한 번역 작업이 유럽 점성술 전통의 출발점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다.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저자로는 7~8세기에 활동한 점성가 아부 마샤르Ab? Ma’shar와 마샤알라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책은 모두 32권이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크레모나의 제라르드와 세비야의 존 같은 12세기의 뛰어난 번역자들이 그 작업을 맡았다. 특히 세비야의 존이 번역한 이븐 알파루한의 《탄생도誕生圖에 관한 연구
The Book of Nativities》는 16세기까지 유럽 점성술 서적의 베스트셀러로 남게 된다.
--- pp.142-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