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그냥 작은 구멍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무서운 집중력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색 바랜 남색 줄무늬 팬티의 일부분. 그리고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탄력적인 리듬. 이상하다는 것을 아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엄마가, 들썩, 섬 그늘에, 들썩, 들썩, 구울, 들썩, 따러어, 들썩, 가며언, 들썩, 들썩. 외간 남자의 엉덩이를 이렇게 주의 깊게 지켜본 적이 있었던가. 나잇살이 붙어 사실상 늘어진 엉덩이였지만, 나는 그 엉덩이가 내 가슴으로 돌진해 쾅 하고 부딪치는 거대한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찰나였다. 늙은 남자 엉덩이 페티시(Sexual fetishism)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지만 나는 주변이 찬란하게 빛나는 찰나를 경험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순간은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순간임과 동시에 말한다 해도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을 순간이라는 사실을. 절대 들킬 염려가 없는 비밀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그게 내 비밀다운 첫 비밀이라는 사실을. 첫 비밀이, 낚시가게 아저씨 엉덩이라는 사실을. 황당하지만 사실이었다. 어이가 없지만 사실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었다. 사실이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 사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 하며 말을 건넸을 때도. --- p.16
나는 다시 말했다. 존나 카와이! 존나 카와이! 존나 카와이! 백만 가지 표현보다 그 하나의 표현이 나았다. 그거 한마디면 다 됐다. 그 애에 대한 욕지거리도, 원망도, 비난도, 내 속상함도, 부끄러움도, 수치스러움도 죄다 눌러버리고 한마디만 하면 됐다. 다 무시해버리고 한마디만 하면 됐다. 말하는 순간, 내 주변에는 보호막이 둘러쳐졌고 나는 나를 숨길 수 있었다. 그건 분명 괴로운 일이었지만 하고 싶은 말을 해서 얻게 될 괴로움보다는 나은 것이었다. 아, 존나 카와이. 나는 내 안에서 튀어나오려 애쓰고 있는 말들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며, 가슴 깊이 묻어두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어느 유려한 문장가가 환생해도 다 표현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수의 문장이 내 머릿속을 괴롭히다가 한마디로 쫓겨났다. 아 그냥 존나 카와이. --- p.41
그는 어쨌거나 바벨탑 이후로 우리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신의 저주는 지구상 60억 인구가 적어도 60억 표현을 사용하도록 한 것이었을지도 몰라. 그걸 받은 사람들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각 나라별 표현을 정해놓았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을 뿐이니까 끊임없이 대화가 안 되는 식의 문제가 발생하는 거고 말이야.]
[결국 해결할 수 없다는 말 아니에요
[적어도 각자가 자기 자신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는 있다는 거지.] --- p.94
“그렇게 살면서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운 거야. 그렇지만 너는 달라. 터키어 강의를 듣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들을 하니까. 네 정서를 네가 의식하고 네 말과 행동을 네가 알고 또 깨닫는 것은 재미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살면서도 부자연스러울지도 몰라. 넌 의식하고 있거든. 그러나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는 요소가 없기 때문에 너를 이상하다고 여기는 거야. 하지만 터키어 문법정리를 하고 있잖아. 물론 터키어 문법정리는 터키어 문법을 정리한 것뿐이지만 네가 의식하고 있는 한 네 이야기를 해낼 수 있게 돼.”
터키어 문법정리라고는 하지만 터키어는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은 내 마음대로 해낸 엉터리 터키어 문법정리는 어쩌면 내 비밀 같은 것들도 누설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희망에 확신을 품었다. --- p.189
그는 터키어가 어렸을 때의 버릇 혹은 습관에서 비롯됐다고 말했지만 나는 어쩌면 어렸을 때 못 하고 못 받은 이해가, 자라면서 못 하고 못 받은 이해가 자기 자신이 안 하고 안 받는다고 믿는 그 이해가 표현을 배우는 것으로 드러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해를 원하고 있고 바라고 있는데 자기 자신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거나 이해받을 수 없다고 믿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해의 수단인 표현을 계속해서 배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219
“그러니까 말하는 방법이 중요해요. ‘저 여자 화났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제가 실수 많이 했죠. 제가 따뜻한 차 한잔 대접할게요’나 ‘비바람 부는데 저 때문에 고생하셨죠. 제가 맛있는 점심 대접해드릴게요’를 생각하는 것이 나아요. 북소리를 들은 젊은이는 다른 북을 쳐서 ‘저 여기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어요. ‘너 왜 집 나갔니’ ‘아버지가 나가라고 말했어요.’ ‘네가 아껴두던 쌀로 밥을 지었잖아.’ ‘밥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죽이었어요.’ 말하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죠.”
상대에게 듣고 싶은 말을 아무 말 하지 않고 들을 수 없듯이 ‘나는 왜 터키어 강의를 들었을까’, ‘나는 왜 터키어 문법정리를 했을까’ 같은 질문들의 해답을 터키어 강의와 터키어 문법정리를 계속하지 않고는 찾을 수 없었다. 듣고 싶은 것과 찾고 싶은 것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들과 다가가는 내가 맞닥뜨리는 좁은 틈새에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 p.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