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의 토대에 무의식적인 가치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제시하기 위해, 바슐라르는 제1장 「불과 존경」에서 우선 불이 어떻게 사회적 금기를 통해 존경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지, 그리고 불이라는 자연현상이 일반적 금지의 대상이 됨으로써 복합적이고 혼란스런 사회적 인식들에 연루된 결과 불에 대한 “천진한 인식”, 즉 ‘가치 부여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현상으로서의 불에 대한 인식’의 여지가 없어지게 된다는 점을 논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 금지를 어기고 불을 내 것으로 하여 아버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데, 바슐라르는 이를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로 명명할 것을 제의한다.
제2장 「불과 몽상.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에서는 몽상의 대상으로서의 불을 논한다. 바슐라르는 인간은 필요의 피조물이 아니라 욕망의 피조물이요, 불의 유용성만으로는 불에 대한 주관적 가치 부여를 설명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인간 정신의 형성에 몽상이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강조하면서 불에 대한 명상이 어떻게 우리의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를 결정짓게 되는지를 논한다. 그리고 ‘화형대의 부름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나의 근본적인 시적 테마로 남아 있으며, 객관적 인식에게는 그것이 순전히 날조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무의식적 몽상에게는 여전히 심오하게 실재적이고 능동적으로 남아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꿈은 경험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다.
제3장 「정신분석과 선사. 노발리스 콤플렉스」에서는 ‘최초의 인간들은 불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합리적 설명, 선사시대의 불의 정복을 설명하는 객관적 이유들의 취약점을 고발하면서, 원시인의 불의 정복 자체는 물론이요 이에 대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여러 가지 설명들의 불충분과 모순과 오류도, 정신분석학적 관점, 즉 불의 성(性)화 작용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쉽게 해명된다는 점을 제시한다. 바슐라르는 정신분석학적 고찰, 말하자면 ‘마찰’에 대한 내밀한 성적 욕망, 따뜻한 품에 대한 원초적 갈망 등에 대한 고찰의 중요성을 부단히 강조하면서, 이러한 몽상과 욕망이 어떻게 전(前) 과학적인 정신들을 어지럽히고 있는지 하나씩 열거해나가다가, 이를 바탕으로 노발리스의 시를 분석하면서 “마찰에 의해 야기된 불을 향한 충동, 열을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노발리스 콤플렉스로 명명한다.
제4장 「성화된 불」은 3장에서 제기된 불의 성화 작용에 대한 심화된 탐구라 할 수 있다. 로비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어떻게 불을 ‘생식력’을 가진 실체로 간주했는지를 살피고, 연금술의 불, 가장 강력한 불로 남성화된 불을 고찰하며, 불이야말로 인간의 정신이 성찰한 최초의 대상임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정신 자체가 불에 대한 명상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즈음에서 우리는 합리적 설명이나 객관적 해석의 빈약함과 시적 몽상의 풍요로움을 부단히 대비시켜나가는 바슐라르의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객관적 인식의 방해물을 제거한다는 애초의 의도는 어디로 가고, 어느새 그는 시적 몽상의 풍요로움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다. 과학의 축(사유의 축)을 시의 축(몽상의 축)에 대립시키며, 과학의 축을 바로 세우기 위해 기획된 책이 시의 축의 풍요로움과 인간 정신의 ‘형성자’로서의 몽상의 가치와 중요성을 확인하고 강조하는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다.
제5장 「불의 화학」에서 바슐라르는 탐구의 장을 ‘불’이라는 현상에서 ‘불이 낳는’ 현상으로 바꾸고, 이번에는 시인이나 몽상가가 아니라 과거의 화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을 살핀다. 지금까지는 논의의 초점이 불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 가치 부여(혹은 콤플렉스)를 살피는 데 모아졌다면, 불에 부여된 그러한 무의식적 가치들이 불이 낳는 현상에 대한 과학자들의 객관적 인식 노력을 어떻게 어지럽히는지를 다룬 이 장이야말로 어쩌면 책의 본래 기획 의도에 가장 부합하는 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의 첫머리에서부터 그는 “사유와 꿈의 연속성을 포착하고, 사유와 꿈의 그러한 결합에서 왜곡되고 패배당하는 쪽이 언제나 사유라는 것을 지각”한다고 예고하면서, 사람들이 불에 대해 품는 천진한 관념들로 인해 어떻게 불이 “과학적 사유를 방해하는 실체론적 장애와 물활론적 장애”가 되는지를 하나씩 살펴나간다. 불의 원소가 도처에 하나의 실체로 실재한다는 관념이 어떤 오류를 낳는지, 불이 살아 있는 존재처럼 음식을 먹는다는 관념이라든가 불과 동일시된 전류에 대한 그릇된 실체론적 관념이 어떤 오류를 낳는지, 열과 불의 실재화는 또 어떤 오류들을 낳고, 어떻게 불이 과학의 영역에서 형이상학적 원리(삶과 죽음, 존재와 무의 원리)로 가치 부여되는지, 그리고 소화 작용의 신화가 어떻게 뱃속에 실재하는 불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낳는 데 일조하게 되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내밀한 불, 불꽃 없는 불이라는 관념으로 이어지게 되는지 등을 두루 살펴본 뒤, 그는 이 모든 과학적 오류들이 사실은 바로 무의식적 욕망임을 확인하고, 몽상의 질기고 질긴 그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힘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이 같은 모순들을 쌓는 것은 바로 “불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이다”라고까지 그는 말한다.
제6장에서 바슐라르는 다시 시적 몽상으로 되돌아와 그 작용 원리를 탐색한다. 화주(火酒), 즉 ‘타는 물’의 이중성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하여, 거기에서 펀치 콤플렉스를 드러내고, 호프만의 환상(幻想) 시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불의 악마들”이 어떻게 그의 상상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지 밝힌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몽상이란 것이 하나의 방향성과 기울기를 가지며 이를 잘 파악해야만 어떤 시인의 상상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편다. 그리고 장 폴의 펀치 콤플렉스와 오네디의 시편 분석을 통해서는, 시인의 몽상과 독자의 몽상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제6장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바슐라르 본인도 미처 그 중요성을 잘 의식하지 못한 듯 여기서는 이렇듯 간결하게 언급하고 말지만, 이 문제는 『물과 꿈』, 『공기와 꿈』, 『대지와 의지의 몽상』, 『대지와 휴식의 몽상』 등 뒤이은 일련의 저작들에서 그가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느 면에서 이 6장은 뒤이은 일련의 저술들에 대한 예비적 고찰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호프만과 에드가 포의 몽상을 비교한 후, 바슐라르는 ‘타는 물’과 결부된 아르파공 콤플렉스를 분석하고 에밀 졸라의 몽상에 깃든 호프만 콤플렉스를 검토한다.
마지막 장인 제7장 「이상화된 불. 불과 순수」에서 바슐라르는 고전적 정신분석의 승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변증법적 승화” 개념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개념을 불에 관한 심리학적 문제에 적용해볼 것을 제의한다. 불을 원죄와 악(성적 충동)의 표지로만 볼 수 없고, 승화라는 것을 이 억압된 충동의 해방으로만 볼 수도 없으며, 억압이라는 것 자체가 고전적 정신분석학의 주장과는 달리 “정상적인 활동이요, 유용한 활동이며, 즐거운 활동”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승화에는 “두 개의 중심”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불은 “순수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며 그는 상징의 다원성이라는 문제를 천착하고, 순수와 불순의 변증법이 사람들의 몽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예시한다.
불의 이상화에 대한 이 마지막 고찰을 끝으로, 바슐라르는 이 책의 결론에 이른다. 그는 결론의 첫 구절에서 “만약 우리의 이 작업이 몽상의 물리학 혹은 화학의 토대로, 즉 몽상의 객관적 조건들을 규정하는 하나의 밑그림으로 간주될 수 있는 거라면, 그것은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객관적 문예비평을 위한 도구를 마련해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라며, “몽상의 물리학(혹은 화학)”을 말하고 있다. 그의 이 언급은 이 책의 기획 의도가 완전히 전도되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책의 서문에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을 가로막는 몽상을 정신분석함으로써 “검증되지 않은 확신들”, 그 “최초의 직관들에 대한 자기도취를 파괴”해야 한다고 역설하던 바슐라르가 결론에 이르러서는 몽상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확인하고, 이 책을 몽상의 객관적 조건들을 규정하는 하나의 밑그림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객관적 인식을 가로막는 장애(몽상)를 정신분석을 통해 해소한다는 애초의 의도가 어느새 몽상을 객관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는 의도로 바뀌어 있지 않은가. 바슐라르의 이 전향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몽상의 객관적 조건들을 규정할 수만 있다면 엄밀한 객관적 문예비평이 가능하리라는 것. 꽃이 자기 고유의 화식도(花式圖)를 가지고 탄생하듯이 시 역시 그러한 다이어그램을 갖고 있으리라는 이러한 발상으로 문예비평의 새로운 영감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