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상상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 상상에는 백해무익한 온갖 이미지가 가득하며, 그 이미지가 우리를 영적 파멸로 몰아가는 때가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그런 이미지들을 버리고 싶어해야 한다. 예수님에게 나아가 솔직하고 단순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저는 이 생각들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생각들을 통해 누린 즐거움도 누리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즐거움은 주님입니다. 저는 주님의 생각과 이미지만 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참 자아 안에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말할 수 없어도 절망할 상황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포기할 용기가 생길 때까지 손 놓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 상황 자체를 기도로 바꿀 수 있다. 선한 것을 원하는 마음 그 자체를 기도로 바꿀 수 있다. 선한 것을 원하는 마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빌 2:13), 상상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다. 이전에 있던 부정한 즐거움의 근원을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다. 내면의 상태가 어떻든 그 상태를 기도 제목으로 삼아 그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 기꺼이 우리를 받아 주신다.
참 자아를 찾고 싶은 마음을 구하는 기도보다 하나님이 더 응답해 주고 싶어하시는 기도가 또 있을까! 이 기도는 전혀 이기적이지도 않으며, 우리에게 해롭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절하지 않으시는 기도다. 하나님은 참 즐거움과 참 즐거움이 아닌 것에 대한, 참 존재와 참 존재가 아닌 것에 대한 생각을 서서히 그러나 느낄 수 있게 바꿔 주심으로 응답하기 시작하실 것이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게 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될 것이다.
생각을 예수님 앞에서 인정할 준비가 되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버리고 더는 그 생각에서 나오는 즐거움을 탐하지 않을 준비가 되었다면 예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이다. 깊은 상상에 성령을 보내 주셔서 악하고 잘못된 모든 이미지들을 휘저어 의식 위로 떠오르게 하시기를 구하라. 이 일을 예수님의 임재 가운데 하지 않는다면 위험할 수 있다. 그분과 함께 있으면 그분의 밝은 빛 앞에서 우리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기에, 한때 우리를 손에 넣었던 그 생각들의 힘에 더는 속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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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치유는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삶의 모든 과정과 사건마다 아시고 우리를 기꺼이 당신께 이끄셨다. 우리와 함께 걸으셨고, 창조적인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시시각각 손 내미셨다.
믿기 어렵다면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문해 보면 된다. 깊이 사랑하는 소중한 친구가 있는데 그가 지금 곤경에 처해 있다고 하자. 능력만 있다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친구를 돕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당연히 없다! 그런데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보는 대신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이며 막연한 것으로 만든다. 그분이야말로 모든 구체적이고 인격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창조한 분인데 말이다. 그분의 사랑은 본질상 적극적이다. 인간도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중에 있으면 나 몰라라 할 수 없는데, 도울 능력과 돕고자 하는 선한 동기를 갖춘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적극적이겠는가?
우리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을 내적 자아로 받아들인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강해지고 창조적이 되었으며, 더 많은 사랑과 자유를 누렸다. 즉 우리는 영적으로 자랐다. 우리가 자랑스럽고 기쁘게 여기는 이런 체험들이 우리의 미래를 쌓아 올리는 기초가 되어 준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순간도 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거부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상처를 준 사람이 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줬어야 할 사람이어서 혼란스러졌을 수 있다. 상황의 고통이 너무 커서 곁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생각이 명료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급격히 진전되는 상황마다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습관이 몸에 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너무 어려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사랑 앞에 머무르는 법을 몰랐을 수도 있다.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예수님이 도와주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수도(물론 말도 안 된다)있다. 누군가의 도움을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는 방어적 태도 때문에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법을 몰랐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결과는 같다. 악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라고 느끼면서 어려운 순간들을 홀로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파괴적인 체험이 우리를 사로잡아 그런 경험을 통해 자라기는 커녕 오히려 상처를 입었다.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모르고 혼자 고통을 겪느라 아파하면서, 내적 자아는 불구가 되거나 아예 파괴되었다.
--- pp.134~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