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흙같은 어둠 속에 젊은 여인이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고개를 돌려 그림 밖의 우리를 내다보고 있다. 젊은 여인은 황색 재킷 속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머리에는 흰색 물감을 섞은 울트라마린 블루 터번을 둘렀으며, 그위를 황색 천으로 묶어 머리 뒤로 늘어 뜨려다. 여인은 왼쪽 귀에다 떨어지는 물방울 모양의 큰 진주 귀고리를 하고 있다. 빛을 받아 젊고 순수한 아가씨의 얼굴이 환한게 드러난다. 살짝 열린 입이 꼭 무슨말인가 속삭일 것만 같다.
(나에게... 또는 당신에게...)
--- p.78
외설 문학의 대가 사드 후작에 관한 영화 「퀼스(Quills)」에서는 사드를 당장 없애버리라고 명령하는 나폴레옹을 아주 우스꽝스럽게 비하한다. 그는 키가 너무도 작아, 옥좌에 앉을 때 두 다리가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폴레옹의 키가 정말 그렇게 작았다면, 남의 신체적 결함을 그런 웃음거리로 전락시킨 감독의 냉소적 태도는 불손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키가 그 정도로 작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영화 감독은 나폴레옹을 그렇게 비하시키고 싶었을까? 앵그르(1780∼1867년)가 그린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에서 발 밑에 벨벳 방석을 빼버리고(그림 89), 나폴레옹의 두 다리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럴 정도는 아닌 것 같다. 「퀼스」를 만든 감독이 나폴레옹을 그렇게 비하시킨 것이나 앵그르가 나폴레옹을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신격화한 것이나, 양쪽 다 너무 과장한 게 분명하다. ……나폴레옹(1769∼1821년)은 순수 프랑스 혈통은 아니었다. 그는 이탈리아계 변호사 출신인 카를로 부오나파르테의 아들로, 그가 태어나기 1년 전 코르시카 섬은 프랑스의 루이 15세와 제노바 공화국의 협약에 따라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원래 이름도 이탈리아 식으로 나폴레오네였다. 아버지 카를로는 처음에는 코르시카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곧 노선을 바꿔 프랑스 귀족이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영화 「드라큐라」에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을 이용해서 드라큐라 저택의 내부 벽면에 걸린 드라큐라 백작의 조상 초상화를 꾸몄다. 뒤러의 자화상 얼굴을 드라큐라 역할을 맡은 게리 올드맨 얼굴로 대체한 것이다(그림 2와 4 비교). 코폴라의 아이디어는 무척 흥미롭고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감독은 뒤러의 자화상에서 꽤나 귀족적인 그로테스크함을 느꼈을 것이다. 다음에 혹시나 뒤러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뒤러 역에는 게리 올드맨이 아주 적격일 게다.
이탈리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었다면 독일에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er, 1471∼1528년)가 있었다. 뒤러는 알프스 이북의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이었다. ……뒤러만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도 드물다. 그는 미술가의 사회적 위치, 또 미술가로서의 자신의 존재 등에 대해 깊이 고민한 흔적을 자화상으로 남겼는지도 모른다. 1500년 뒤러는 여러 자화상 중 문제의 그 자화상을 그렸다(그림 4). 뒤러는 자신을 모피를 덧댄 갈색 외투를 입은, 완전 정면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얼굴을 화면 중앙에 배치하고, 가르마 부위의 애교머리처럼 보이는 부분만 빼면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그렸다. 길고 어두운 고수머리는 잘 다듬어져 어깨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 얼굴과 마찬가지로 좌우 정중앙에 그려진 오른손은 칼라의 모피 부분을 쥐고 있다. 그런데 집게손가락과 구부려진 가운뎃손가락으로 털 더미를 잡아낸 모양은 어쩐지 해부학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과연 털 더미를 잡고 있는 이 손가락의 형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너무도 의미심장해 문장 몇 줄로 간단히 풀어낼 수는 없을 듯싶다. 수많은 학자가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가 노년기에 그린 「모나 리자」의 명성이 너무 높은 나머지 때때로 그의 다른 아름다운 여인상이 빛을 못 보고 만다. 그 한 예가 바로 「체칠리아 갈레라니―흰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이다. ……밀라노의 군주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 공작, 일명 루도비코 일 모로(il moro)는 레오나르도에게 아주 정숙한 밀라노 귀족 태생의 한 여인의 초상을 부탁했다(그림 28). ……체칠리아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시선은 조용히 등 너머에 둔다. 배경은 칠흑처럼 어두운데, 그녀의 왼쪽에서 빛을 받아 어깨 부분이 환하게 빛난다. 이는 후대 화가들이 사용한 극단적 명암 대비의 시조로 보인다.
체칠리아가 안고 있는 짐승은 족제비과에 속하는 담비로, 대개는 황갈색이지만 겨울에는 담색(淡色)으로 털갈이를 한다. 특히 흰색 담비는 털의 질이 좋아 고급 모피에 이용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는 체칠리아에게 왜 하필이면 흰색 담비를 안겨주었을까? ……독일의 미술사가 슈나이더는 청순 무구한 체칠리아의 얼굴과는 달리 도발적인 눈에 근육이 불거진 자그마한 흰색 족제비의 어쩐지 표리부동한 듯한 모습, 또 푸른색 의상의 팔죽지 부분을 죽 갈라 붉은색 속감을 대고 주름 장식을 낸 여인의 옷에 초점을 두고 있다(그림 30). 삼각 꼴로 터진 어깨 주름은 양쪽으로 금색 천 안감을 대었다. 슈나이더는 이 부분을 여성의 버자이너(Vagina), 즉 질(膣)로 해석했다. 순결과 순수함을 상징한다고 여겨 온 흰 족제비 녀석은 바로 그 한가운데에 오른쪽 앞발을 디디고 있다.
슈나이더는 이 같은 시각적 묘사가 성 관계에 대한 능동성을 의미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눈앞이나 기억 속에 항상 존재하기를 원한다' -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 기억하고픈 사람의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하고자 하는 충동은 멀리 고대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렇기에 많은 미술사가들이 미술의 기원을 인물화에서 찾기도 했다. 종교화이건 주문 초상화인건 자화상이건 그림 속에 그려진 인간의 얼굴은 감상자에게 다양한 상상을 가능케 하며 가장 쉽게 예술적 감흥을 주기도 한다.
--- 소개의 글 중에서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에서 부부가 한 작품에 함께 그려진 것과는 달리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그의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는 각각 다른 목판에 완전 측면으로 그려져 서로 마주보도록 액자에 끼워져 있다(그림 58, 59). 다시 그 목판 뒤편에는 남편이 두 필의 백마가 끄는 마차를, 신부는 두 필의 유니콘 마차를 타고 서로 마주오는 장면이 재현되어 있다. 그래서 우피치 미술관은 이 그림을 유리관에 넣어 전시하여 관람객들이 앞뒤로 둘러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반니 아르놀피니의 얼굴도 오늘날의 웬만한 서양 남자와는 달리 왜소하고 못생겼지만, 페데리코와 그의 부인 바티스타의 초상도 그에 못지 않다.
바티스타는 결혼 후 수년 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자, 아들을 하나 갖게 해주면 자신을 바치겠다고 성 귀도발도에게 기도했다. 그러자 1472년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고, 부부는 그 아이에게 귀도발도라는 성인의 이름을 붙였다. 결국 자기 자신을 바치겠다고 한 기도의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왔을까? 그해 바티스타는 폐렴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바티스타가 죽자 페데리코는 공직에서 물러나, 자신이 수집한 장서를 채운 개인 도서관에 틀어박혀 지냈다. 거기서 그는, 아들의 탄생을 위한 성스러운 기도와 연관 있을지도 모르는 부인의 죽음을 생각하며 그녀를 추모했다. 이 그림은 바로 부인을 지극히 사랑했던 페데리코가 친분 있는 화가 피에로를 시켜 두 사람의 깊은 부부애를 기리기 위해 제작한 것이었다. 사실 바티스타의 핏기 없는 얼굴과 생기 없는 페데리코의 모습은 마치 데드마스크를 보는 듯하다. 페데리코는 자신이 죽은 후에 바티스타와 함께 있을 것을 예견이라도 해서 아예 죽은 모습처럼 그리게 한 것일까? ……어쩌면 이 부부는 각자의 위치에서 도덕적이며 영적인 승리를 상징하는 개선 마차를 타고 이상적인 곳, 천국에서 재결합하여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에서 부부가 한 작품에 함께 그려진 것과는 달리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와 그의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는 각각 다른 목판에 완전 측면으로 그려져 서로 마주보도록 액자에 끼워져 있다(그림 58, 59). 다시 그 목판 뒤편에는 남편이 두 필의 백마가 끄는 마차를, 신부는 두 필의 유니콘 마차를 타고 서로 마주오는 장면이 재현되어 있다. 그래서 우피치 미술관은 이 그림을 유리관에 넣어 전시하여 관람객들이 앞뒤로 둘러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반니 아르놀피니의 얼굴도 오늘날의 웬만한 서양 남자와는 달리 왜소하고 못생겼지만, 페데리코와 그의 부인 바티스타의 초상도 그에 못지 않다.
바티스타는 결혼 후 수년 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자, 아들을 하나 갖게 해주면 자신을 바치겠다고 성 귀도발도에게 기도했다. 그러자 1472년 드디어 아들이 태어났고, 부부는 그 아이에게 귀도발도라는 성인의 이름을 붙였다. 결국 자기 자신을 바치겠다고 한 기도의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왔을까? 그해 바티스타는 폐렴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바티스타가 죽자 페데리코는 공직에서 물러나, 자신이 수집한 장서를 채운 개인 도서관에 틀어박혀 지냈다. 거기서 그는, 아들의 탄생을 위한 성스러운 기도와 연관 있을지도 모르는 부인의 죽음을 생각하며 그녀를 추모했다. 이 그림은 바로 부인을 지극히 사랑했던 페데리코가 친분 있는 화가 피에로를 시켜 두 사람의 깊은 부부애를 기리기 위해 제작한 것이었다. 사실 바티스타의 핏기 없는 얼굴과 생기 없는 페데리코의 모습은 마치 데드마스크를 보는 듯하다. 페데리코는 자신이 죽은 후에 바티스타와 함께 있을 것을 예견이라도 해서 아예 죽은 모습처럼 그리게 한 것일까? ……어쩌면 이 부부는 각자의 위치에서 도덕적이며 영적인 승리를 상징하는 개선 마차를 타고 이상적인 곳, 천국에서 재결합하여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