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예배에서 경이감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무엇을 경이롭게 생각해야 하느냐 예배를 드리면 되지 꼭 무슨 신비로움이 있어야 하느냐 하는 물음이 당연히 나올 법하다. 우리는 주석 성경도 읽고 설교를 받아 적고, 책도 읽고 설교도 듣는다. 그것뿐이랴. 우리는 설교 테이프를 듣기도 하고 세미나에 참석해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해 전문가의 의견을 청취하기도 한다. 성경의 개요를 잡고 분석하는 한편, 하나님의 속성을 정의하고 성경의 사건들을 시대별로 요약하기도 한다. 이미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무슨 경이감이 남아 있을 것인가?
더욱이 우리는 우주 시대에 살고 있다. 로켓을 쏘아 올리고, 우주선이 별나라를 왔다갔다하는 세상이다. 텔레비전에서 제공하는 다큐멘터리 덕분에 생명의 잉태, 화산 폭발, 꽃의 성장, 물고기의 산란, 초신성에 관한 정보 등 거의 모든 신비를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 있다. 길버트 체스터턴은, "세상은 더이상 놀라운 일들을 갈망하지 않는다. 세상은 다만 진정한 경이로움에 굶주려 있다"고 했다.
오늘날 교회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위기를 맞는다. 대부분의 설교가 무엇을 설명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의 신비와 은총의 계시에 놀라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신학적으로 정의하고, 그 내용을 항목으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모든 것이 조직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지만, 더이상 아무 것도 경이로운 것은 없다. 물론 이는 예배를 드릴 때 판단이나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나아가 이해와 설명이 불가능한 수많은 일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하낟. 이런 점에서 현대 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토런스가 남긴 다음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배는 하나님을 묵상함으로써 놀라움과 경이를 느끼는 마음의 활동이다. 이는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한편, 우리의 논리적인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어린아이의 삶은 경이감으로 가득하다. 이 경이감 때문에 어린아이는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꽃이나 곤충을 대할 때도 상상력이 넘치는 창조적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그런 능력을 잃지 않기를 소망한다. (...)
경이감은 여러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몇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놀람, 당혹, 경외, 탄복, 몰입 등등. 히브리 성경("그 이름은 기묘자'wonderful'라, 사 9:6)에서 경이감은 "구별되다, 분리되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은 다른 것과 비교해 질적인 차이를 갖는 독특한 것이라는 개념을 지닌다. 영어성경에는 "감추어진, 놀라운, 지극히 높은, 지극히 난해한" 등과 같은 의미로 번역되어 있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헬라어도 이와 비슷하게 "놀라운, 이상한, 기적적인, 불가사의한"과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이처럼 유사 의미를 갖는 단어들이 많지만 한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곧 참된 경이감은 일시적인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전 존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감정이다. 경이감은 깊이와 함께 가치를 지닌다. 다시 말해, 경이감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경이감은 일시적인 기쁨으로 끝나는 값싼 즐거움이 아니다. 경이감은 신적 존재의 실체, 곧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갖게 되는 경외심이다.(...)
어떤 사람들은 경이감이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미개인은 라디오나 비행기 같은 것을 보면 소스라쳐 놀라지만, 문명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러한 주장의 요지이다. 하지만 경이감은 무지가 아니라 지식에서 온다. 꽃이나 곤충, 또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경건한 사람들은 더욱더 그로 인해 압도된다. 과학이나 신학적인 사실은 머리를 채우지만, 진리는 경건한 사람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고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교제를 나누게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가 지니는 역설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알수 없은 것을 알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한다. 다윗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갈망하며 만족과 불만족을 동시에 느낀다. 육체의 눈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영광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사모한다. 우리는 또한 베드로처럼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면서도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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