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명사는 형용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형용사는 온전한 명사를 어지럽힐 뿐이다. 하지만 명사가 문화에 의해 손상을 입거나 문화로 인해 병들면, 그때는 형용사가 필요하다.
'목회자'는 건강하고 건전한 명사의 하나였다. 활기차고 강건한 단어였다. 나는 그 단어의 소리를 언제나 좋아했다. 어렸을 적부터, 그 단어를 들으면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람들에 대해 동정심을 품고 있는 인물이 떠올랐다. 비록 내가 알고 있었던 목회자들은 그와 같은 특성들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단어 자체는 여러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과는 정반대로 온건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요즘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불러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으면, 나는 언제나 '목회자'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오늘의 미국 사회에서 목회자의 소명이 인식되는 방식을 살펴보고 '목회자'라는 단어를 말하는 어조와 정황들을 자세히 들어보면, 내가 그 단어 속에서 듣는 것과 다른 이들이 듣는 것이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인 용법에서 그 단어는 나약한 의미로 사용된다. 패러디에 의해 정의되고 기회주의에 의해 희석된다. '목회자'라는 단어를 강화시킬 형용사의 사용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이와같은 형용사의 사용을 끊임없이 없애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세상 문화가 내게 넘겨준 '목회자'에 대한 정의를 거부함으로써 그 단어를 재정의하고, 성경의 통찰력과 심상으로 나의 삶을 재구성해야 한다. 세상 문화는 상당히 친절하게 나를 대해준다. 내가 정통 신조를 유지하도록 격려해주면서 복음사역에 임할 것을 권한다. 남다른 헌신을 칭찬한다.
세상 문화는 내가 수행하는 목회 사역에 대한 자신의 정의(definition)를 받아들일 것만을 요구한다. 세상 문화는 자신이 가진 선한 의지를 촉진하는 역할을 내게 요구한다. 자신의 선한 의도에 성수(holy water)를 뿌려주는 사제가 될 것을 원한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나의 친구들이다. 물론 나는 그들이 의식적으로 해를 끼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잠시라도 목회자인 나에 대한 세상 문화의 정의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특별한 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악함과 어리석음을 마음껏 비난하고 나의 비난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관대하게 대우받을 것이다. 나는 세상의 호의를 조직화하고 세상은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해야 몇 주 밖에 가지 못한다.
온전한 목회자가 되려면 재정의(redefinition)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나는 명사를 명백하게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용사를 제시하고자 한다. 분주하지 않은, 파고적인, 종말론적인.
--- pp 30~31
내가 사춘기 청소년이었을 때 목사님은 종종 우리집에 오시곤 했다. 잠시 동안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에, 목사님은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 영혼의 상태는 어떠했니?" 그분은 언제나 '영혼'이라는 말을 강조하셨다.
나는 말을 많이 한 적이 없었다. 당시에 나는 위협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의 내 인생을 채우고 있는 생각들과 경험들은 너무 하찮은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내가 영혼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싶었다면, 목사님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학교 야구팀에서 쫓겨난 사건을 세상적인 헛된 일로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 쉽게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
대다수 사람들, 대부분의 시간이 중대한 국면에 처해 있지는 않다. 목회사역이 복음을 제시하고 실제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믿음의 삶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면, 목회자들은 소설가인 윌리엄 골등이 '평범한 우주(ordinary universe)'라 부른 것에 정통한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일들, 아이들을 학교에서 조퇴시키고,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며, 회사 동료의 불평을 매일 들어주고, 저녁 뉴스를 시청하며, 휴식 시간에 잡담을 나누는 일을 알아야 한다.(...)
어린 시절에 만난 나이 많은 목사님이 일상적인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모습은 내 삶의 대부분이 마치 신령하지 못한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내가 경험한 광범위한 영역들은 '영적인'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상적'인 것이었다. 나는 목회자가 되어 그런 접근법이 사람들의 삶에 나타난 대부분이 경우로부터 나를 격리시킨다는 것을 알기 전가지 그와 같은 방식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
잡담을 불편하게 여기고 견디지 못하는 유일한 목회자가 나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나는 내가 설교와 변증학과 권면에 대한 중요한 대화의 우선권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성급함을 합리화하는 유일한 목회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대화의 주제들을 모두 제시할 기회를 가진다면, 우리는 무언가 영적으로 중요한 주제들을 제시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대화의 주제들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소명과 훈련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접근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마땅한 직무가 아니겠는가?
--- pp 152~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