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만든‘책 읽는 사대부’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독서하면 선비,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대부는 기본적으로 독서인이었다. 혁명으로 고려를 뒤엎고 사대부의 나라 조선을 세웠으니 다음은 독서인을 만들 차례였다. 세종조에 이르러 활짝 핀 출판문화는 독서인층, 곧 지배층을 확대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여기서 저자는 당시 출간된 책들이 대부분 한문책이었다는 점을 되짚는다. 사실 세종하면 ‘한글 창제’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그는 결코 한글을 금속활자로 만들거나 책을 찍어내 민중에게 읽히자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몇몇 언해본이 있지만, 이는 소수 지배층에게 필요한 서적을 인쇄하기 위해 그때그때 소량을 만들어 쓴 것일 뿐이다. 즉, 처음부터 한글로만 쓰인 책을 찍기 위해 한글 금속활자를 만든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금속활자며 세종조의 인쇄기술은 결코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조선이 생산한 책의 절대 다수가 한문책이고 그 독자가 사대부라면, 그 책들이 지향하는 바는 분명해진다. 곧 사대부의 지배 이념을 사회 깊숙이 침투시키는 수단, 그것이 바로 책이다. 그 대표적 사례로 저자는 조선의 도덕화에 앞장선 조광조를 꼽는다. 이른바 조광조로 대표되는 ‘기묘사림’은《소학》,《삼강행실도》등 막대한 분량의 윤리서를 찍어 보급하는 것을 최대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어 퇴계와 율곡은 당시에 보급된《주자대전》을 정독하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었다.
어떤 책을 읽고 썼던가
조선의 서적문화를 이해하는 기본 틀을 제시한 후, 저자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지식인들과 얽힌 책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특히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것이 중국 책의 조선 유입이다. 이를테면, 구입은 물론 베껴서라도 ‘내 책으로’ 만들고야 말았던 장서가 유희춘이 수집한 책들의 대부분은 중국 책이었다.
이렇듯 조선 지식인들의 주요 독서물은 고전 내지 당대에 수입된 중국 서적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저자는,《지봉유설》은 이수광이 중국에 갔을 때 수입했던 서적들을 읽고 코멘트를 달아 편집한 것이며,《성호사설》은 중국의 최신 서적을 읽은 이익이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정리한 책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18세기 홍대용이 베이징을 찾은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베이징 방문 열풍이 불었고, 서적 수입은 더욱 활발해진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과물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정약용이 쏟아낸 많은 저작들과 박지원의 독특한 산문 등이 그것이다. 특히 박지원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일반적인 논의들과 다르다.
연암의 위대함은 그의 독창성에서 왔다고 말한다. 연암의 위대함에 말참견을 할 수 없듯, 그의 독창성 역시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연암을 연구했던 연구자들은, ‘연암의 위대함’을 미리 설정해 놓고, 그 위대함을 어떻게든 입증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모든 연구는 이렇게 정식화될 수 있다. “연암은 위대하다. 왜, 연암은 위대하니까.”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이다. 하지만 말이 된다. 우리는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민족이 남긴 문학의 위대함을 입증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연암의 문학은 어디에서 왔을까 중에서
책을 탄압한 정조도 막지 못한 독서열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군주인 정조는 규장각을 축으로 문신들을 불러 모아 경사강의를 열었다. 스스로 강의 프로그램을 짜고 신하들에게 과제를 내주어 발표하고 토론하게 했다. 얼핏 보면 학문을 권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경전과 역사에 대한 발표와 토론 과정을 통해 그는 신하들의 학문 수준과 그들의 대뇌에 담긴 생각을 점검할 수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정조는 당시 조선에 알려진 명과 청 최신 학문의 유통 상황을 점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지식인에게 이단의 싹이 트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경사강의를 통해서였다. 당연히 그 결과는 사상탄압과 대안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책을 탄압하는 호학의 군주, 정조
중국 책 시장에서 들어온 방대한 양의 서적은 많은 변화를 낳았다. 이로 인해 책들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시기가 바로 ‘정조’ 때였다. ‘문체반정’은 그 시기를 대표하는 사건이었는데, 박지원과 이옥 등이 그 피해자였다. 반면 중국에서 수입한 책으로 거창한 장서를 구축한 장서가들도 등장한다. 18세기 이래 장서는 경화세족의 생활문화이기도 했는데, 홍석주가 그 대표적 예다.
저자는 이들 모두가 베이징에서 수입된 책들의 애독자이자 비평가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독특한 독서문화를 수립했으니, 유만주처럼 방대한 서적을 읽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독서가가 출현하는가 하면, 홍석주처럼 나름의 독서 원리와 방법을 구축한 경우도 있었다.
홍석주의 책 목록은 저 고전으로부터 최신의 서적까지 망라하고 있다. 예컨대 수학을 의미하는 ‘수가’에 딸린 책을 보면, 주나라의 수학책《주비산경》과 한나라의 수학책《구장산술》부터 당시 조선에 전해졌던 서양의 수학책《기하원본》과《수리정온》까지 망라하고 있다. 가장의 장서와 자신이 읽었던 책, 그리고 읽고 싶은 책으로 엮은 목록이니, 애당초 무슨 대학 선정, 무슨 신문사 선정 고전백선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홍석주에게서 진정한 인문학자, 진정한 독서가의 모습을 본다. 서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아니하는 칸막이 속에 앉아 바늘 끝 같은 분야를 공부하노라면서, 우리는 그것을 ‘전공’이란 거룩한 명사로 부른다. 슬프다. 인문학이 원래 추구했던 삶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은 어디에 갔는가. 홍석주의《독서록》을 보고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쇠퇴를 한탄하기 전에, 정말이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홍석주 가문의 책 읽기 중에서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