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신호를 보낼 뿐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포착하는 데 있다. 그것은 분명히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숨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징표를 보이며 모호하게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확실하게 소통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통을 단절하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소통의 가능성을 무한하게 열어두는 것이다. 이는 명증성과 논리 적합성이 철학적 소통의 전부가 아님을 뜻한다. 로고스와 변증법의 주창자에게도 명확한 이성만이 철학은 아닌 것이다. 철학은 환상의 모호함을 자유롭게 향유함으로써 성숙해진다.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철학은 예술적 창조물만큼이나 환상적일 수 있다. ---p.123~124
빅토르 프랑켄슈타인도 자신의 피조물을 그냥 ‘것’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지어주고 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면 좀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괴물도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대를 온전하게 인정한다는 뜻이며 관계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서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낯섦과 추함을 넘어서 서로 상대에게 유의미한 ‘무엇’이 되겠다는 신호이다. ---p.134~135
《드라큘라》는 영생을 추구하는 비상식적이며 괴기한 방식을 이야기로 구성해 보이면서, 동시에 영생과 영원성에 대한 도덕적 성찰의 화두를 제시한다. 또한 ‘중간자’ 개념을 도입해서 생명의 다양한 존재방식을 상상한다. 이와 함께 육체와 영혼에 관한 고전적 주제를 특별한 시각으로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형이상학적, 종교학적, 과학적 차원에서 인류가 거둔 위대한 성취에 괴기소설의 주제가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길은 참으로 여러 갈래이지 않는가. ---p.157
영화는 지난 100여 년의 역사에서 수많은 현실을 제시해왔다. 영화의 본질적 성격이 ‘현실’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철학의 본질적 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을 탐구하는 것이다. 철학하기는 현실을 보고 생각하는 일이다. 그것을 ‘관조(觀照)’라고 하기도 한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탐구하기도 하고, 고대로부터 서구 사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는 플라톤 철학이 제시한 ‘이데아(idea)의 현실’도 탐구한다. ---p.165
펠리니의 작품이 철학적이라는 것은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들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능성의 신비함이 철학을 자극한다. 인생의 신비로움과 경외감에서 철학은 새롭게 사유할 힘을 얻는다. 펠리니의 영화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철학적이라고 여겨온 논리의 틀 안에서 설정되지 않는다. 합리적 인과율에 매이지 않은 사건들의 이야기에 그런 논리는 없다. 펠리니의 작품은 오히려 철학적인 것 밖의 서정(抒情)과 환상이 풍부한 세상을 펼쳐 보여줌으로써, 철학의 시선을 끈다. 그것은 철학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길’을 향해 던지는 시선일 게다. 엄연한 현실이 아니라, 아련한 현실의 길을 향한 시선이기 때문이다. ---p.200~201
나는 언젠가 인간이 우주에서 인간보다 더 탁월한 존재와 조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인간을 더 잘 알기 위해서도, 인간이 변화하기 위해서도 ‘좋은 일’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인류가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타자가 필요하다. 그 타자는 적어도 인간만큼 지적 능력을 갖춘 존재여야 한다. 아니, 인간보다 지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나다면 인간이 자신을 반성하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인간은 바뀌어야 한다. 자신이 바꾸어놓은 지구라는 삶의 터전에 대해 보은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p.215
키케로는 또한 권력과 우정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오늘날 정치인들이 들어둘 만한 점을 지적한다. ‘정치적 대의(大義)’가 우정의 의미를 가리는 경우에 대한 현실적 고찰이 그것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아닌 게 아니라 우정보다 돈을 더 선호한다면 비열하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우정보다 관직과 정치적 군사적 권력과 출세를 우선하지 않을 사람들을 찾기란 쉽지 않네. ……인간의 본성이 권력을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기 때문이라네. 그리고 누가 친구를 버리고 권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런 중대한 이유에서 친구를 버린 만큼 자기 과오가 잊혀지리라고 믿는다네.” ---p.254~255
읽기와 쓰기는 그에게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타인의 책’과 교제함으로써 ‘자기 책’의 창조자가 되었다. 그리고 글을 씀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사유의 세계로 이행했다. 그러하기에 “내 책이 나를 만든 것 이상으로 내가 내 책을 만들지는 않았다‘라는 몽테뉴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혼란의 시기, 자아를 찾고 세계를 인식하며 인간 조건을 통찰하기 위한 실험의 여정에 동반하여 그 좌우에 읽기와 쓰기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탐구하는 인간에게 동반하는 읽기와 쓰기는 ’책과의 우정‘이 주는 혜택이다. ---p.273
도킨스가 유전자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지만, 그 개념은 늘 모호한 상태로 유지된다. 이는 환원적 접근법에서 성공적인 환원일수록 최종적으로 환원된 기초 단위를 완전하고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환원적 이론체계에서 명확하게 설명되는 것은 그 체계의 각 요소들(또는 단계들)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 …… 이런 체계는 ‘불확실성 위에’ 세워진 조밀한 인과관계의 구조물인 것이다.
---p.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