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적 공리주의는 결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쓸모있는 답을 내놓지 못한다. 파스칼은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오직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며 행복하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라고 말했지만, 새로운 사고의 철학자들은 칸트와 더불어 이렇게 주장했다. ‘인간은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고 일관되게 말할 수 없고’ 또한 ‘자신을 진실로 행복하게 해줄 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다-그럴 수 있으려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의 전통적 지혜는 고뇌 없이도 쉽게 알 수 있는 답을 갖고 있었다. 즉, 인간의 행복은 더 ‘높이’ 올라가 자신의 ‘가장 높은’ 능력을 개발하고 ‘가장 높은’ 사물들에 대한 지식을 얻으며 가능하면 ‘신을 보는’ 것이다. 만약 더 ‘낮게’ 내려가 동물들과 공유한 ‘낮은’ 능력만을 개발한다면, 그는 매우 불행해지고 절망에 빠질 수 있다.---p.25
털없는 원숭이를 비롯하여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정의들이 과학의 이름 아래 세상에 나온 것만큼 현대세계의 야만화에 기여한 것은 없다. 그 누가 그런 동물에게, 다른 털없는 원숭이에게 그리고 바로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동물을 ‘동물기계’라고 이야기할 때, 그들은 곧 동물을 그렇게 취급하기 시작한다. 또 사람들이 자신을 ‘털없는 원숭이’로 생각할 때, 수성(獸性)이 그들 속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게 모든 문이 열린다.---p.38
‘조작을 위한 과학’이 지혜, 즉 ‘이해를 위한 과학’에 종속될 때 그것은 가치있는 도구이고 또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혜의 추구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아서 지혜 자체가 사라질 때, ‘조작을 위한 과학’을 종속시킬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데카르트 이래 지속되어온 서양 사상의 역사이다. 오래된 과학-지혜 또는 ‘이해를 위한 과학’-은 근본적으로 지고선, 즉 그것에 대한 앎이 우리에게 행복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진선미를 지향했다. 반면에 새로운 과학은 물질적인 힘을 지향했고, 이러한 추세는 오늘날 정치 및 경제적인 힘의 증대가 과학과 관련된 막대한 지출의 첫째 목적이자 그것을 정당화하는 주된 근거로 간주될 정도로까지 심화되었다. 옛 과학은 자연을 인간의 어머니로 생각한 데 비해 새 과학은 정복해야 할 상대 또는 파내서 이용해야 하는 자원으로 간주한다.---p.85또 ‘조작을 위한 과학’은 더 복잡하게 발전해가면서 거의 필연적으로 자연의 조작에서 인간의 조작으로 나아간다.---p.84
우리는 지식의 제1영역에는 직접 다가갈 수 있지만, 제3영역에는 그럴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게는 우리의 의도가 행동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기 쉽고, 이로 인해 우리의 의도보다는 행동이 더 실제적이기 쉬운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해가 빚어질 수 있다. 만일 내가 제1영역에서, 즉 나의 내적 경험에서만 ‘나의 모습’을 끌어낸다면,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기 쉬울 수밖에 없다. 모든 게 나를 축으로 하여 돌고, 내가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사라져버린다. 나의 괴로움은 세상을 눈물의 골짜기로 만들고, 나의 행복은 세상을 환희의 정원으로 만든다. 히틀러 치하 독일의 세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인 괴벨스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멸망하면 세계가 멸망할 것이다.’---p.141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공상과학 소설이며 일종의 기만이기도 하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현대인을 ‘과학’과 ‘종교’의 화해할 수 없는 다툼처럼 보이는 대립 속에 가둬버린 속임수이다. 그것은 인간의 지위를 끌어올리는 모든 믿음들을 파괴하고, 인간의 지위를 끌어내리는 하나의 신조를 내세웠다.... 모든 것을 오로지 적응과 생존을 위한 자연선택으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진화론은 19세기 유물론적 공리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산물이다. 20세기의 사고가 스스로 이 기만을 없애지 못하는 것은 서양문명의 붕괴를 가져온다고 해도 관계가 없을 엄청난 잘못이다. 어떠한 문명도 안락과 생존의 공리주의를 뛰어넘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믿음, 즉 종교적인 믿음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p.168
현대 인류의 전능(全能)에 대한 믿음은 점차 무너지고 있다. 더욱이 ‘새로운’ 문제들은 기술적으로 해결된다고 해도 경망한 말과 행동, 무질서, 부패의 만연 상태는 남을 것이다. 그것들은 현재의 위기들이 심화되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스스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실험’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이른바 현대의 실험은 내가 데카르트식 혁명이라고 부른 것, 즉 무자비한 논리를 휘둘러, 자신의 인간성을 혼자 힘으로 유지할 수 있는 ‘높은 단계’로부터 인간을 멀어지게 한 것에 의해 촉진되었다. 인간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스스로 닫고, 엄청난 에너지와 재능을 쏟아부으면서 자신을 현세에 가두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 그들도 현세가 한순간 머무는 곳에 지나지 않고, 천국에 오르기를 거부한다면 지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교회 없이 살아가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기쁨이나 고통, 흥분, 만족, 품위 등 무엇을 얻든 ‘보통의 삶’보다 높은 단계와 연결을 유지하고 그것을 향해 발전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종교 없이 살아가기 위한 현대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현대 이후’의 우리의 할 일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pp.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