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지는 아마노에게 마일 수를 적은 종이를 받았다. 그리고 숫자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한 자릿수부터 순서대로 손으로 가린 부분을 치워 가며 발표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마노는 못마땅한 기색 없이 부탁하는 대로 해 주었다.
“이러면 될까요?”
아마노는 종이를 손으로 가렸다.
“네. 그럼 순서대로 발표 부탁하겠습니다.”
“일 단위 수가 영. 십 단위 수가 사. 백 단위 수가 구. 천 단위 수가 오.”
믿을 수 없다, 오천 마일이나 쌓였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만 단위 수도 기대하게 된다. 과연.
“만 단위 수는…… 삼.”
“헉!”
맙소사! 엉겁결에 속마음이 새어나왔다. 그렇다는 건…….
“삼만오천구백사십 마일입니다.”
“말도 안 돼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축하합니다! 천국행이 결정되셨습니다. 이 정도 점수면 충분히 행복한 사후를 보내실 수 있습니다.”
“잠깐만요. 그게 정말 제 마일리지가 맞나요? 다른 사람을 도운 기억이 별로 없는데요. 뭔가 착오가 있었다거나 자릿수를 잘못 세신 게 아닐까요?”
아마노는 다시 한 번 확인하더니 말했다.
“아니요.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덕을 쌓았다고 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요.”
아마노는 명세표를 훑어보더니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미무라 씨는 이승에서 많은 선행을 쌓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터라 착한 일을 해서 쌓은 포인트는 얼마 안 되죠. 탈탈 긁어모아도 삼백 마일 정돕니다.”
그럼 어떻게 그토록 터무니없이 높은 마일리지를 쌓았단 말인가.
“대신 많이 웃고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셨군요.”
“웃기만 해도 마일리지가 쌓인단 말입니까.”
“네. 진심으로 웃거나 남을 웃게 하면 한 번에 영점일 마일이 쌓입니다. 미무라 씨는 엄청나게 많이 웃고, 또 웃음을 주셨네요.”
요컨대, 단순계산으로 삼십오만 번 이상 웃거나 주위에 웃음을 퍼트린 셈이다.
“저도 이 일을 한 지 제법 오래됐는데, 웃음 횟수만으로 천국에 가는 분을 만나 뵙기는 처음이군요.”
--- p.26~27
“미련을 없앨 수 있습니다.”
아마노가 말했다.
“자세히 좀 설명해 주세요.”
“미련에 관한 기억을 지우는 거죠.”
기억을 삭제한다는 말인가…….
“염려 마십시오. 기억을 삭제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할 수 없으니까요.”
내가 웃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가족 덕분이다. 이런저런 재미있는 일들을 생각할 여유가 있었던 것도 가족 덕분이다. 아무리 일이 고달파도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웃을 수 있었던 것 또한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련을 지운다는 건 가족을 잊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만.”
아마노가 입을 열었다.
“방법이 있기는 있습니다.”
아마노가 잠깐 거들었지만, 주저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어떤 방법이죠?”
슈지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마노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천국 마일리지를 사용해서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정말이죠?”
슈지는 아마노에게 달려들며 말했다.
“……네. 근데, 요즘 환율 상황이 좋지 않아서요.”
“마일리지를 전부 사용하면 며칠 동안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아마노는 계산기처럼 보이는 물건을 꺼내 계산했다.
“마일리지를 전부 사용하면 엿새하고 두 시간 삼십 분 삼십육 초 동안 돌아갈 수 있습니다. 완전히 손해 보는 장사라니까요. 앞으로 영원히 천국에서 살 수 있는데, 이승에서는 고작 일주일밖에 지낼 수 없거든요. 그래서 이 시스템은 아무도 이용하지 않으려고 해요.”
“엿새라. 그 정도면 어떻게든 손을 써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p.42~44
“같이 갈래?”
“나랑 같은 방향이야?”
“응, 아마 그럴걸.”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키는 요이치로가 약간 더 컸다. 아들은 건널목을 건널 때 하얀색 부분만 밟고 걷는다. 슈지도 뒤에서 요이치로를 흉내 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한 번이라도 더 아들을 웃게 해야 한다. 슈지는 살짝 앞질러가 자동판매기 앞에 섰다.
“있잖아, 자동판매기에는 차가운 음료랑 따뜻한 음료가 있잖아. 그럼 그 중간에 낀 음료는 미지근한 음료일까”
“그런가?”
웃지 않는다. 이게 아닌가.
“그럼, 왕이 넘어지면 뭐라고 하게?”
“…….”
뭐라고 말 좀 해 봐. 맞든 틀리든 말을 해야 재밌지. 왜 그러는 건데?
“몰라.”
왜 바로 포기하는데.
“정답은 ‘킹콩’입니다.”
“그렇구나.”
감탄한 기색은 보이지만, 조금도 웃지 않는다.
“친구랑 모래놀이터에서 모래동산을 만들고 양쪽에서 굴을 파서 중간에서 만나서 악수하면 굉장히 뿌듯하지 않냐?”
요즘 애들은 모래장난 같은 건 시시해서 안 하나,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들의 웃음을 터트리는 급소를 통 모르겠다. 슈지가 어떻게든 웃겨 보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요이치로가 말을 걸었다.
“『달려라 메로스』 재밌더라.”
“정말? 근데 너, 안 웃더라.”
“마음속으로 웃었어.”
소리를 내어 웃으란 말이다. 그나저나 마음속으로 웃는 건 마일리지로 적립되려나. 일주일 만에 평생 삼십만 번을 웃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예상보다 훨씬 버겁다. 슈지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너, 일주일 후면 전학 간다며?”
“고작 일주일이지만 신나는 일이 잔뜩 생겼으면 좋겠어.”
슈지가 웃는 얼굴로 대답하자 요이치로는 배시시 웃었다. 지금 웃음은 마일리지로 적립해 주려나? 슈지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 p.91~92
“참관수업에서 뭘 보여 줄 생각이람.”
한 엄마가 빈정대는 말투로 질문하자 게이코 선생님이 말했다.
“참관수업 날 최고의 수업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육 학년 삼 반 아이들이 얼마나 우수한지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 말에 아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야, 다른 반보다 진도도 늦고 평균점수도 꼴찌잖아.”
술렁거림이 한층 커졌다.
“어떤 과목으로 증명할 생각일까?”
“국어, 아니, 사횐가? 아니다, 수학…… 혹시 도덕?”
“당신 말이야. 우릴 우습게 보는 거야, 뭐야?”
부모 중 한 사람이 거친 말투로 윽박질렀다.
“자자, 다들 고정하시고. 게이코 선생님도 학부모분들이 이해하실 수 있도록 설명해 보세요.”
교장 선생님이 허둥지둥 중재에 나섰다.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암기하기만 해서는 입시 이외의 곳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제로 활용할 수 있어야 참지식이죠.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그 사람이 다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합니다. 제가 말하는 우수함이 바로 그런 힘입니다. 아이들은 공부의 의미를 착각하고 있습니다. 공부는 암기가 아닙니다. 자유롭게 발상을 펼쳐 나가기 위한 날개입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게 저희 교사의 역할입니다.”
“발상의 날개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이 답답한 양반아, 지금은 하나라도 더 많은 문제를 풀어서 입시에 합격해야 한다니까.”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게 교사의 역할 아니야?”
부모들은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이들이 공부의 의미를 오해하는 건 부모들 탓이라고 슈지는 생각했다.
그 순간, 부모 중 한 사람이 말문을 열었다.
“재밌겠네요. 게이코 선생님이 그렇게 자신 있다면 국어, 수학, 과학, 사회 전 과목에서 증명해 보이면 되겠네요. 안 그래요?”
그 제안에 다른 부모들도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코 선생님이 하는 말도 타당하지만, 아이들에게 증명해 보이게 만든다는 계획은 지나치게 무모하다. 부모들의 도발에 넘어가면 끝장이다. 슈지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알겠습니다. 국어, 수학, 과학, 사회, 전 과목에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넘어갔다! 아이들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내질렀다. 마치 뭉크의 [절규] 같은 광경이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전 과목에서 증명해 보인다니 지나치게 무모하다. 게이코 선생님은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일을 벌이는 걸까.
“증명하지 못할 때는 담임에서 물러난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 p.148~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