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문 없는 문
은사 스님은 돌아가시고, 집도 절도 없이 몸뚱어리 하나 끌고 동가숙서가식, 거처 없이 떠돌았다. 부모와 형제를 버리고 출가한 몸. 내딛는 걸음걸음 사람들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노숙자, 부랑아. 거처가 없으니 주소가 없었다. 주민등록도 말소되었다. 예비군훈련을 받지 않아 고발되었다. 불행한 일들만 닥쳐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누나는 목을 매었고 형은 대장암으로 죽었다. 고통의 고통에 의한 고통을 위한 승도 속도 아닌, 패배자였다. 끝없는 절망. 불안함에 소주와 함께 담배와 함께 불쾌하고 불편하고 불온했던 나.
한 발짝 두 발짝 발을 떼어놓았지만 오른발과 왼발이 맞지 않았다. 내가 나에게 속았다. 내가 나에게 막말과 욕설을 퍼부었다.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네가 나한테 정말 이러면 안 돼. 나는 이제 나의 슬픔과 싸우는 걸 포기하기로 했어. 슬픔과 고통, 광기로 찬 네 눈은 보기도 싫어. 다시는 보지 않을 것이야…….’ 그러다 부처님이 ‘일어나, 일어나. 이제 그만. 여기까지’ 하며 나를 달래주었다. 그래도 수천 개의 나의 머리들은 서로 다른 곳만 쳐다보며 엉뚱한 짓들을 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어느 날 말라르메의 말장난 같은 시구가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관세음보살을 찾으며 눈을 씀벅거렸다. 삼십대의 나였다.
---「잠 못 드는 이에게 밤은 멀어라」중에서
2부/ 빈 배에 달빛만 싣고
“거문고의 줄도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너무 팽팽하면 끊어진다. 수행이란, 잘 살고 잘 죽고자 하는 것이다. 잘 사는 게 수행이고 해탈 열반, 잘 죽는 게 바로 견성성불이요, 도(道)인기라.”
스님의 말씀은 서릿발 같았다. 길은 어디에도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다. 길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철웅 스님의 말씀을 지금도 나는 내게 묻고 대답하곤 한다. “넘치는가, 모자라는가. 넘치면 넘치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정진하고 또 정진하고 사시게” 하시던 말씀이 뼈에 사무친다.
꿈으로 지나온 길, 지나가는 길. 순탄한 길인가, 험난한 길인가. 바람 같은 낮길, 물 같은 밤길. 막힌 길, 되돌아가던 길. 괴로움과 슬픔이 들끓던 빗길과 눈길. 지혜가 어두워 잃었던 길. 거기가 어디였던가. 거기가 여기고 여기가 거긴데, 왜 가는 길마다 다 깔딱고개고 까풀막길이었던가. 그래도 환희에 넘쳐 두 손 두 팔 벌려 만세를 부르던 길. 가도 가도 꿈, 꿈속의 꿈으로 가는 길. 행복, 그깨달음을 향해 가는 길이었음을.
---「잘 살고 잘 죽는 게 수행이다」중에서
3부/ 젖은 나무는 타지 않는다
참선하다 보면 입 열면 벌써 틀리고 생각이 움직이면 어긋날 것이다. 그래도 입을 열어야 한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수백 번 고쳐 쓰듯, 선정수행을 닦아야 증득할 수 있다. 그렇게 알음알이를 유발하지만 그 눈병 난, 선병(禪病)에 든 알음알이도 보리다. 비록 그 알음알이는 업장을 녹일 수도 없고 번뇌를 물리치고 자유로울 수도 없지만 마음을 확실히 깨닫는 길의 과정이다. 깨달음 그 궁극의 목표, 위아래로 꿰고 종횡으로 막힘이 없을 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소중한 것이다.
삶에 대해 절절히 갈구하는 이여. 진정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여.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세상을 사는 이여. 참선을 하라. 화두를 들라. 참선화두는 절간, 선방, 스님네들의 소유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로 수행터요, 선방인 것이다.
---「선, 화두를 들라」중에서
4부/ 달을 삼킨 개구리
자신감을 가져야 해. 스님 막무가내였던 거 알지? 자존감은 배짱이야, 배짱. 우리는 빈손으로 왔고 가져갈 것도 버릴 것도 없는 인생이야. 그러니 너를 존중해야해. 자학하지 마. 환경에 지배받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니? 너는 너에게 사랑받을 권리가 있어. 너는 무한한 가치가 있고 소중한 존재야. 또 너는 무한한 성과를 이루어 낼 수 있어.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네가 확신해서 행동한다면. (중략)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해. 있는 그대로, 멋 부리려 하지 말고 내 선택과 행동을 책임져야 해. 나는 당당한 네가 되기를 원해. 우리 참되고 바르고 가치 있는 삶을 살자. 성실함과 근면, 인내와 용기. 스님은 너한테 절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야 그 기존질서 속에서 발생되는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거야. 스님이 행복을 찾으려면, 깨달음을 얻으려면 너를 나를 우리를 믿어라, 대신심, 대분심(大憤心), 대의심이라고 했지. 인생을 살아가는 건 마음공부야. 원력을 세워야 해. 그래야만 꼼꼼히 생각하고 더 큰 걸 볼 수 있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