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을 현대적인 것으로 추구할 때 몇가지 어려움에 봉착한다. 첫째, 표현 양식과 메시지를 신중하게 구분해야 한다. 나는 경건한 표현 양식이나 불경건한 표현 양식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이런 식의 구분을 시도할수록 혼란만 가중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예술의 본질과 형식을 주제로 캠브리지에서 개최되었던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리스도인 예술가 가운데 한 명-매우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이 기독교적 양식의 음악이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상당 시간 논의한 끝에 그에게 기독교적 양식(스타일)을 규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였다. 그는 마침내 이렇게 대답했다. "기독교적 음악은 흥겹게 장단을 맞출 수 있는 음악입니다." 이런 대답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표현 양식이나 불경건한 표현 양식과 같은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표현 양식이 예술 작품의 내용이나 주제와 전혀 무관하다고 순진하게 생각하거나 오해해서는 안된다. 표현 양식 자체는 어떤 세계관이나 메시지에 대한 상징 체계나 도구로 발달된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세 예술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분명히 구분되는 양식이 나타난다. 필리포 립피(Filippo Lippi)가 생각하는 동정녀 마리아의 성격과 르네상스 이전 시기에 회화를 통해 강조되던 동정녀 마리아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예술사를 깊이 있게 공부할 필요는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은 인습적이지 않고 훨씬 자연스럽다. 우리 시대에는 엘리어트와 피카소 같은 인물들이 새로운 내용을 말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을 개발했다.
언어 자체도 유사하다. 산스크리트어는 힌두 철학을 위한 완벽한 수단으로 발달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상 어떤 산스크리트어 학자들은 기독교가 산스크리트어로 전달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단정할 수 있는 권한이 내게 전혀 없지만 그들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영어와 독일어는 모두 기독교 메시지를 중심으로 하여 근대적 형태로 정립되었다. 루터가 성경을 번역할 당시의 독일어는 여러가지 방언으로 나뉘어 있었다. 루터의 성경 번역을 계기로 하여 독일어의 표준적인 형식이 정착되었다. 루터의 독일어가 문어체 독일어가 되었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성경의 초기 번역본들이 킹 제임스 번역을 통해 총체적으로 정리되었고 영어의 위상 정립에 동일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의미의 단어가 기독교적 의미를 지닌 단어라면 기독교를 쉽게 가르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긴 설명을 덧붙이지 않으면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가 매우 어렵고, 일본에서는 '죄책감'이라는 단어가 의식적인 부정(ceremonial uncleanliness)이라는 일본식 개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 의식적인 부정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거룩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깨닫게 되는 진정한 도덕적 죄책감을 설명하려는 일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경우라면 우리는 그 개념을 재정의하고 우리가 어떤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듣는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그 단어가 원래 속해 있던 상징 체계에서 지녔던 의미와는 다른 뜻을 지녀야 한다.
예술의 양식과 형식에 동일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황무지"를 예를 들어, 엘리어트의 시 형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파편화된 형식은 단절된 인간 상황에 대한 인식과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엘리어트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후 "동방 박사의 여행"(The Journey of the Magi)이라는 작품에서는 이와 같은 형식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이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기독교적 성격의 메시지에 맞게 그것을 수정했다. 그러나 그는 그 형식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황무지에서 사용하던 형식을 수정하여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맞게 맞추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엘리어트는 '현대적 인간'으로서의 엘리어트와는 약간 다른 형식을 채택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20세기의 표현 양식을 사용해야 하지만 그 양식들이 태동되게 한 세계관의 지배를 받는 방식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기독교는 상층부의 일련의 '종교적' 진리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 자체로 분명한 명제적 내용이 있는 메시지이다. 전인적 인간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때 전인성은 인간의 미학적 감수성과 정서 뿐 아니라 지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내용을 전달할 수 없는 예술의 형식이나 양식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로 사용될수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표현 양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파편화되 산문이나 시는 지적 내용을 전달할 수 없으며, 내용 없이는 기독교를 전파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부적절하다. 복음의 소식인 성경의 메시지는 내용이 있는 좋은 소식이다.
예술가들이 선택하는 표현 양식에 대한 반응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가령 기독교 록 그룹에서 활동하면서 록을 통한 예술 형식을 시도한다고 생각해 보자. 나아가 커피숍에 들어가 록을 이용해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한다고 가정해 보자.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활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주의해야 한다. 연주를 마친 후 당신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이해했는지 물어 보아야 한다. 당신이 그들의 현대적인 표현 수단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당신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샜는가? 아니면 단순히 그들에게 익숙한 형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당신의 록 연주를 들은 사람들이 항상 들어오던 것을 다시 들은 것에 불과한가? 내용이 전달될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을 거시다. 모든 상황이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접하고 이는 상황과 시도하려는 의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록 음악뿐 아니라 포크 음악에서도 만연되어 있다.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당신은 그를 예수라 하지만 나는 그를 구세주라고 한다네'와 같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조안 바에즈와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은, 그녀가 "나는 그를 구세주라고 한다네"라고 노래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남부 포크송이나 컨추리풍의 서부 음악이나 힌두 서정 가곡을 멋지게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목적은 포크송을 불러서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단순히 포크송만 부르는 행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크송을 통해 하나의 세계관을 전달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 pp 61~63
"예술이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면, 예술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예술의 정당성은 이미 그것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가능성이라는 사실에 내재한다."
--- '예술과 그리스도인' 중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과 성경 규범 아래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 삶의 창조적인 부분이 그리스도께 바쳐져 있는가?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주인이시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진리--불타오르는 진리--뿐 아니라 아름다움도 창출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술 작품이어야 한다. 상실과 절망으로 허덕이는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진리와 아름다움의 예술로 빚어져 가는 삶이어야 한다."
--- --'예술과 성경' 중에서
"예술이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면, 예술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예술의 정당성은 이미 그것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가능성이라는 사실에 내재한다."
--- '예술과 그리스도인' 중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과 성경 규범 아래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 삶의 창조적인 부분이 그리스도께 바쳐져 있는가?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주인이시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진리--불타오르는 진리--뿐 아니라 아름다움도 창출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술 작품이어야 한다. 상실과 절망으로 허덕이는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진리와 아름다움의 예술로 빚어져 가는 삶이어야 한다."
--- --'예술과 성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