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지혜의 깊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장자가 대답하였다.
“매미는 높이 날아오르는 봉황새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야 있는 힘을 다해 봤자 기껏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가지 위로 오를 수 있어. 어느 때는 거기도 오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하지. 그런데 저 봉황새란 놈은 왜 하늘 꼭대기까지 일부러 올라가려는 거야?’
가까운 곳에 나가는 사람은 세끼 밥만 챙겨 가지고 가도 배를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 길을 가는 사람은 그만큼 먹을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매미가 봉황새의 자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 작은 지혜는 큰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을 모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침에 생겨났다가 햇빛을 보면 말라 죽는 조균이라는 버섯은 아침과 저녁을 아예 모르는 법입니다.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라는 게 이렇습니다. 그러니 겨우 논문 하나 쓸 정도의 지혜밖에 없는 학자, 자기 전공에 갇혀 다른 영역을 볼 수 없는 막혀 있는 학자, 권력에 아부하며 권세를 누리려는 졸부학자, 이런 학자들이야말로 바로 매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왜 매미는 높이 날아오르는 봉황새를 보고 비웃을까?」중에서
학생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무엇을 고민하십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사람다움의 덕을 수양하지 못하는 것,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는 것, 정의를 듣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 치우친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런 것들이 나의 근심거리들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고민하는가?」중에서
직장인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물었다.
“직장생활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기감정조절’입니다. 직장생활에서 피해야 할 도덕적 성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즉, 악덕과 자제력 없음과 짐승 같은 상태입니다. 이 세 가지에 반대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악덕의 반대는 덕이고, 자제력 없음의 반대는 자제입니다. 그리고 짐승 같은 상태의 반대는 초인간적인 덕, 즉 영웅적이고 신적인 성질의 덕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남달리 덕이 뛰어나 신이 될 수 있다면, 이런 상태야말로 짐승 같은 상태의 반대가 될 것입니다. 짐승에게 덕이나 악덕이 없듯이, 신에게도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의 상태는 덕보다 고귀한 것이요, 짐승 같은 상태는 악덕과는 다른 상태입니다.”
---「직장생활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감정조절이다」중에서
정치인이 맹자에게 물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어떤 점에 유념해야 합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누군가를 아껴주는데도 친해지지 않으면 자기의 ‘사람다움’을 반성하고, 남을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으면 자기의 ‘지혜’를 반성하고, 타인에게 예를 행했는데도 답례가 없으면 자기의 ‘예의’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행했는데도 거두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모두 자신을 반성해야 합니다.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바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탁월한 리더십을 기르는 방법입니다.”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바로 돌아온다」중에서
종교인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선과 악은 무엇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였다.
“우리가 악한 행동을 함은 우리의 자유 의지가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고, 그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함은 완전한 자의 정의가 우리에게 요구한 결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 말을 이해하려고 무척이나 애썼지만, 명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빠진 이러한 심연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지만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이 나를 일으켜 완전한 자의 빛으로 조금이나마 인도했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의지가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것을 원하든 그렇지 않든 의지의 주체는 다른 존재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여기에 내 죄악의 원인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악은 실체가 아니라 자유의지의 왜곡이다」중에서
주부가 석가모니에게 물었다.
“주부는 괴롭습니다.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으며, 남편과 아이들은 이것저것 끝없이 요구만 할 뿐 고마워하지도 않습니다. 이럴 때면 집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주부는 이 모든 것을 참고 받아들여야 하나요?”
석가모니가 말하였다.
“답답할 때 가끔은 산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죠. 그러나 집을 떠난다고 문제가 해결 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좋아하는 것을 충족해야 하는 고통, 싫어하는 것을 만나야 하는 고통, 좋지도 싫지도 않은 것을 해야 하는 고통 등 순간순간의 만남이 고통입니다. 그런데 고통을 잘 살펴보면 그 속에 삶의 목적이 있으며, 그 속에 행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식구들을 위해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놀아주고 사랑해 주는 것, 그 속에 진리가 있습니다. 주부님께서는 매일매일 진리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 진리의 빛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진리의 빛을 보게 된다면 고통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입니다.”
---「주부는 동네북인가?」중에서
과학자가 노자에게 물었다.
“과학의 역할은 인간의 풍요로움과 행복입니다. 그러나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욱더 문명의 이기에 목마름을 호소하고 있으며, 마음의 밭은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노자가 대답하였다.
“다섯 가지의 화려한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의 아름다운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합니다.
다섯 가지의 좋은 맛은 사람이 입맛을 버리게 합니다. 각종 오락게임과 무분별한 SNS 정보물을 접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값비싼 물건을 만들어 유통하는 것은 사람의 행실을 그르치게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몸을 기준으로 배를 채울 뿐 문명의 이기에 자기의 소중한 몸을 맡기지 않습니다.
---「왜 문명의 이기에 소중한 몸을 맡겨서는 안 될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