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건이고 싶다’고 예전에 마사미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인간이라고 생각하니까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아 혼란스럽다고….
물건처럼, 바위처럼, 저기 있는 유리컵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을 견디는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을 물건에 비유하고 물건으로 취급함으로써 깊은 절망의 늪에서 기어 올라오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p.207
“마사미의 목소리, 그의 어조, 그가 했던 말이 되살아난다. 마치 좋아하는 작가의 좋아하는 작품 가운데 어떤 페이지의 한 문장에 빨간 연필로 밑줄을 긋기라도 하듯이 나는 마사미가 했던 말에 마음속으로 밑줄을 긋는다. 그리고 다시 읽어 본다. 그것은 내 안의 뭔가를 흔들고 내 안의 뭔가를 끌어낸다. 내 생각,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겹쳐져 하나가 된다. 그러다 보면 내 몸은 안타까운 희열로 채워진다.”--- p.213
“나는 보여. 먹기 딱 좋게 과즙을 가득 머금은 무화과 같은 거야. 만지면 두툼하고 달콤해서 나도 모르게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입에 넣고 싶어지지. 하지만 보통은 속옷이며 스타킹으로 몇 겹씩 싸고 있고 게다가 심장 고동과 함께 울퉁불퉁 뭔지도 모르지만 계속 움직이는 것 같은, 그런 것, 아사오를 상징하는 건 그런 거야. 그거 말고 아무것도 없어.”--- pp. 232~233
“노세와의 육체관계가 전과 다름없이 이어지고 독 안에 든 쥐처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될수록 그와 반비례해서 나는 마사미를 갈망했고 필요로 했고 마음을 태웠다. 가슴 조이는 안타까운 마음은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점점 더 강해졌다. 마사미를 향한 마음을 태우면 태울수록 나는 한편으로 노세를 필요로 했다.
마사미와 깊은 정신적인 교류를 나누고 나면 온몸이 욱신거리는 정체 모를 느낌이 남았다. 그 욱신거림을 나는 노세의 품안에서 잠재웠다. 노세의 품에서 욱신거림을 잠재우고 나면 의식 속에 뻥 뚫린 구멍이 남았음을 깨닫는다. 나는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다시 마사미를 갈망했다. 내 몸이 둘로 딱 분열되는 듯했다.”--- pp.239~240
“잠시 나는 그의 아름다운 육체를 증오했다. 영원히 내 손 안에 넣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영원히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내 육체 안에 녹아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내 눈앞에 있는 이 아름다운 남자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거의 순식간에 열병에 들뜬 사람처럼 만들었다.” --- p.246
“커피숍 유리 너머로 마사미가 테이블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문고본에 눈길을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마사미를 알아본 지 불과 몇 초 후에 마사미 역시 나를 발견했다. 나는 그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퍼지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할 때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변해 가는 것을 보았다. 내 안에 강렬한 엑스터시가 휩쓸고 지나갔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맞닥뜨렸다는 기쁨…. 단지 그것만으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정도로 강렬한 엑스터시에 휩싸였다.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건 분명 성적인 엑스터시였다. 마사미의 육체적 금기가 가져다주는 엑스터시이면서 한편으로 성적인 반응을 동반하지 않은 뭔가 다른 것이기도 했다. 결코 성행위에 이른 적이 없는, 조용히 오래도록 이어지는 강렬한 흥분상태…. 그렇게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관능적인 기분에 빠지는 나 자신이 너무나 혼란스러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pp.260~261
“그의 몸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근육으로 덮인 피부의 매끈하고 단단한 감촉은 그가 평소 육체노동을 한 결과임을 말해주었다. 그의 목덜미에서는 마른 풀처럼 메마른 냄새가 났다. 그가 내는 신음 소리는 냄새가 뿜어져 나올 것처럼 관능적이었다. 그의 애무는 훌륭하고 농후했다. 그의 무게, 생명력 그 자체의 탄력성…. 그의 육체는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꿈틀거리고, 욕정을 느끼고 땀을 흘리면서 포효하는 육체….
그의 육체는 너무나 완벽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p.272
“하카마다 씨의 몸 아래에서 흔들의자가 작은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그는 물었다.
“그 남자는 어떻게 살고 있소?”
“그 남자라니요…?”
“당신과 늘 같이 오던 청년 말이오. 아름다운, 참으로 아름다운 청년이었지.”
나는 단풍잎을 두 손으로 감싸면서 “죽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바다에서….”
침묵이 시작되었다. 길고 긴, 끝이 없을 것 같은 침묵이었다.
마당에서 홍수처럼 넘쳐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빛이 남긴 환영을 상기시키는 하카마다 씨의 허약한 모습이 보였다. 하카마다 씨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이제 와서…” 하고 그가 말했다.
“왜 이제 와서 나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그냥 하카마다 씨를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예전에 누구보다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 당신과 어딘가 많이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하지 못했다.”
--- p.397
“고이케의 여러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탄탄한 구성으로 묘사된 추리와 관능, 그리고 음산한 죽음까지도 상쾌하게 그려내는 타고 난 작가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제는 작가 스스로 더 나아가 관능과 탐미라는 테마에 천착하고 있다. 이 작품 외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유리바다》《무반주》 등을 비롯한 작가의 수많은 중?단편 가운데 주옥같은 여러 작품을 보고 느끼는 면이기도 하다.
꽤 많은 분량이었지만 시간이 가는 것도 잊을 정도로 한여름의 밤을 더운 줄도 모르고 보냈다. 어쩌면 고이케 마리코에 대한 오랜 관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독자에 소개하고 싶은 고이케 마리코의 좋은 작품이 아직 여러 편 있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