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닥의 몇몇 인기 필름 단종 소식에 필름을 잔뜩 사서 냉장고 가득 쟁여놓았다. 그 정도가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내 유일한 조치였다. 거대한 흐름을 애써 막아보자는 저항의 의미는 아니다. 지난 시절 추억에 빠져 ‘현재’라는 발목을 부여잡고 허우적거릴 생각도 없다. 그저 아직까지는 필름이 가진 장점, 아날로그가 찬사를 받는 지점을 조금 더 누리고 싶을 뿐이다. 누군가는 앞만 보지 않고 느리게 그 미덕을 돌아봐줘도 좋겠다. 이 책이 그 긍정적 돌아봄에 하나의 방법이 되었으면 한다.
---「작가의 말」중에서
영화 속 북호텔에는 두 가지 비밀이 있다. 하나는 영화 속 북호텔은 진짜가 아니라 미술감독 트루네가 만든 세트라는 것. 운하며 호텔까지 모두 세트로 재연했다는데 방문해본 결과 감쪽같다. 또하나는 간판은 그대로지만 지금은 호텔이 아니라 레스토랑이라는 점이다. 운 좋게도 숙소가 북호텔 바로 뒤라 나는 영화의 정서를 삼 일 내내 느꼈다. 낮에는 집 앞 공원에서 와인을 마시고 누워서 하늘을 보다가, 저녁엔 북호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와인을 즐겼다. 물론 르네가 거닐었던 생 마르텡 운하를 거닌 건 기본이고. 번화가의 숙소에 질렸다면, 조금만 더 품을 들여 이런 오래된 동네를 찾아보기를 권한다.
---「파리 생 마르텡 운하 - 파리 최상의 숙소를 만나다」중에서
절벽과 바다가 어우러진 남부의 작은 해변 마을. [일 포스티노]가 남긴 흔적을 찾아 본격적으로 길을 나섰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네루다의 집, 술집, 가파른 계단, 찾아봐야 할 곳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촬영지의 분위기를 느낄 만한 단서가 많지 않다. 언덕 중턱에 작은 기념품 가게. 무더운 여름 내리꽂히는 지중해의 햇빛 아래, 빛바래고 먼지가 내려앉은 조악한 영화 엽서가 영화의 흔적을 말해줄 뿐이다. 그래, 결국 영화에서 네루다는 조국 페루로 떠났지. 필생의 멘토를 보내고 남겨진 우편배달부의 쓸쓸함이 배가 되는 기분이다. 언제 매입해서 팔고 있는 걸까. 아마 앞으로도 저 상태의 엽서를 제값을 내고 사는 사람은 없을 텐데. 팔릴 일 없을 듯한 엽서를 상점 입구에 상품으로 전시한 것이 역설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1994년에 개봉한 영화를 찾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까.
---「이탈리아 프로치다 섬 - 이탈리아인의 소박한 휴양지」중에서
투박한 매너가 하나씩 와닿으면서 이 도시에 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오래된 도시 베를린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며칠간 베를린 중심가를 섭렵한 나는 베를린에서도 좀 오래된 곳들로 하루 여행 코스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마침 베를린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다. 티어가르텐에 있는 베를린 동물원은 1844년에 오픈한 곳으로 지금도 베를린 시민의 주말 나들이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화려한 놀이 시설이라곤 없어서 어릴 적 동물원과 비슷해 보였다. 규모가 상당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서울대공원의 4배 규모라고 했다. 덕분에 뜨거운 한낮 동물원을 돌아다니며 진을 다 빼야 했다. 동심에 들떠 들어갔는데 나올 땐 아이들 20명을 지도한 유치원 교사의 몸 상태가 되어 나왔다. 관람객은 아랑곳없는 동물 중심의 동물원. 동물원의 주인인 동물에게 이 정도 공간은 줄 테니, 그들을 만날 생각이 있다면 너희 인간도 이 정도 수고는 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문득 몇 년 전 우리가 갑갑해 뛰쳐나와 뉴스에 등장했던 능동 어린이대공원의 코끼리가 생각났다. 새삼 그 코끼리는 어떻게 됐을까 궁금해진다.
---「독일 베를린 - 힙스터의 열기를 걷어낸 베를린 풍경」중에서
동네는 간소했다. 가장 번화한 곳엔 커다란 마켓과 헌책방 북오프, 그리고 연세 지긋한 노인이 모이는 다방 분위기의 커피숍이 자리했다. 한편에는 채소 가게가 있었는데, 저녁 즈음이 되면 장을 보러 온 마을 사람들로 북적였다. 상점 이름이 ‘야쓰이 야쓰이(싸요 싸)’라서 더 인기가 좋은 것 같았다. 개천을 따라 버드나무가 늘어선 거리에는 선술집이 있어 운치를 더했다. 노렌(일본식 미니 커튼)을 열고 들어가면 드라마 [심야식당]의 풍경이 펼쳐질 것 같은 분위기의 술집이다. 시부야 같이 복작대는 버라이어티함도, 일본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한다는 지유가오카 같은 세련미도 없는 동네. 가장 보통의 동네에서 가장 하릴없는 일과를 보내느라 그해 봄, 나는 ‘바빴다’. 매일 텔레비전을 보았고 혼자서 돌아다니다보니 그즈음은 괜히 잘하지 못하는 일본어도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고, 언젠가 일본어를 마스터하면 보겠다는 요량으로 서점에서 구매하는 책의 수도 점점 늘어갔다.
---「일본 도쿄 세컨드핸드숍 - 가장 보통의 동네」중에서
조금은 무료했던 체스키크롬로프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버스터미널이었다. 다음 여정을 위해 미리 버스 티켓을 사러 가서는, 그만 떠나야 하는 그곳에 반해버린 것이다. 버스터미널은 거의 체코의 끝이라 오스트리아 국경과도 가까웠고, 체스키크롬로프와 체코 각지를 연결하는 버스가 이곳에서 출발했다. 한낮, 낡은 버스터미널 건물과 네온이 없는 1980년대풍의 ‘체스키크롬로프’ 간판. 때마침 줄 맞춰 서 있는 구식 버스 뒤로 노파의 등장, 원피스를 차려입고 낡은 가죽 핸드백을 든 노파가 느리게 풍경 안을 거닐었다. 모든 것이 내게 하나의 장면이 되어 말을 걸었다. 체스키크롬로프 성에서 보낸 시간과 버스터미널에서 보낸 시간을 비교하면 아마 버스터미널에서 아무 일 없이 보냈던 짧은 시간이 더 길고 깊었을 것이다. 체스키크롬로프에 다시 간다면, 버스터미널은 꼭 다시 가고 싶다. 그냥 그렇게, 유명 관광 명소에 가려진 도시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챙겨 나오고 싶다.
---「체코 체스키크롬로프 - 북적이던 관광객이 떠난 자리」중에서
허우 샤오시엔에게 촬영지는 단순히 장소가 아닌, 작품을 구상하고 담아낼 가장 중요한 감정의 그릇이었다. 타이완에서 나고 자라 그 풍광 속에 타이완 사람의 삶을 기록한 감독 허우 샤오시엔. 그에게 영화를 촬영할 장소란 그토록 중요한 곳이었다. 문득 그의 카메라를 따라가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타이완에 가야 했다. 허우 샤오시엔이 그렸던 타이완의 풍경, 그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아보고자 그렇게 타이완으로 향했다. 이 여행의 목적지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대표작 [비정성시]의 촬영지를 택했다. 영화는 수도인 타이베이 근교 마을 ‘지우펀(九?)’에서 촬영됐다. 주 무대가 된 지우펀에서 그는 어떤 감흥을 전달받았을까.
---「타이완 지우펀 - 슬픔을 간직한 역사의 도시」중에서
바르사뱌에서의 첫날, 우연히 들어간 빈티지숍에서 낡은 액자 속 흑백사진을 발견했다. 소녀의 깜찍한 모습을 보며 감탄하자, 중년의 주인이 내게 말을 건다. “내 어릴 적 모습이에요.” 어쩐지 거짓말 같아 “진짜예요?”라는 대답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랬더니 이번엔 아예 사진을 들어 자기 얼굴 옆에 대본다. 가만 보니 소녀의 얼굴에 여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빈티지숍을 2대째 운영중이라는 그녀는 어릴 적부터 빈티지 제품을 수집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그 일을 하며 살 수 있어서 즐겁다고 했다. 오래된 찻잔과 낡은 트렁크, 전등, 인형 등 빈티지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 즐비한데, 가게의 역사를 듣고 보니 어느 하나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 유서 깊은 상점에 들어가 그 역사를 체험한 여성에게 차 한 잔 얻어 마시는 행운이 다시 생각해봐도 믿기지 않는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영화 [피아니스트]를 찍었다는 동네에 이르러 노면전차 철길 옆으로 늘어선 연립주택을 따라 걸을 때에는, 급기야 바르샤바의 모든 것이 좋아졌다. 1980년대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한 템포 느린 이 도시가 내게 준 감흥은 온전히 수식할 길이 없는 흥분이었다.
---「폴란드 바르샤바 - 도시 전체가 영화 오픈 세트」중에서
좌판에서 한참 책을 뒤적거리는데 후두둑 비가 내린다. 할머니 한 분이 사진집 한 권을 들고 있다가 빗물이 묻어 영 가치가 없다며 옆에 있는 나를 불러, 불평을 늘어놓는다. 정확히 빗물을 짚어 보이시는 게 여간 불만이 아니신가보다. 할머니가 책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나는 잽싸게 그 책을 집어들었다. 1959년에 출간된 사진집 『Amsterdam』이다. 흑백의 사진은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아까울 정도로 경이롭다. 운하를 배경으로 한 도심과, 네덜란드 항공사 승무원의 클로즈업 컷,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도심 공원의 위인 동상, 클럽의 춤추는 무희, 야채를 파는 시장 상인, 자전거를 탄 주부, 베르메르 그림을 앞두고도 서로의 대화에 심취해 있는 미술관의 두 남자, 코끼리를 탄 동물원의 소녀, 벼룩시장에서 열심히 책을 고르고 있는 코트 차림의 청년, 어마어마하게 멋있는 전등을 설치중인 전기기술자 등 1950년대 네덜란드인의 생활이 사진에 그대로 묻어난다. 이런 보물을 건지다니! 할머니의 손에서 사진집을 놓게 만든 빗물 한 방울의 절묘한 타이밍에 감사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 2차 대전 폐허 위에 만들어진 재건 도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