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어떠한 선입견도 품지 말아야 합니다. 공부가 어렵다는 생각도, 쉽다는 생각도 다 비워 버려야 합니다. 그저 텅 빈 마음이 되어 유심히 듣다 보면 반드시 기(機)가 발할 때가 있습니다.
‘기’를 우리말로 해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기는 기계 장치의 스위치와 같습니다. 스위치를 켜면 집채만 한 기계도 한순간에 작동됩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키를 돌리면 시동이 걸리고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마음의 세계도 얼마나 거대하고 복잡합니까. 그런데 그 마음에도 자동차의 키와 같고 기계의 스위치와 같은 중심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라고 합니다.
캄캄한 방이라도 전등 스위치만 켜면 바로 환해지듯 우리 마음에 스위치가 켜지면 지혜의 광명이 환하게 펼쳐집니다. 그 스위치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그것은 설법하는 종사의 가르침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준비 상태가 딱 맞아떨어질 때 만들어집니다.
---「“계초심학인문 강설”, 「초심학인의 청법」」중에서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청정한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명과 탐욕에 얽매여 자기 허물이 수미산과 같은데 어찌 남의 죄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참회합니다.”라고 말할 때 나의 계행이 청정해야 속죄하는 사람의 죄도 어느 정도 참회가 되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같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한다고 출가해서 사문이 된 사람은 반드시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수행자의 정신을 굳게 다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수행자는 수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받아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공양 올리고, 옷 갖다 주고, 약 갖다 주는 등 필요한 물품을 제공해 줍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사사공양(四事供養)이라 하여 의복, 음식, 탕약, 와구 네 가지에 한하여 신도들로부터 받도록 하였습니다. 신도들은 이 네 가지를 공양함으로써 청정한 수행자를 받듭니다. 그런데 계행이 청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공양을 받아 봐야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받는 사람은 오히려 빚만 늘어나고, 주는 사람도 깨끗하게 공양함으로써 주는 사람의 의무는 다했지만 크게 복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 본문 136~137쪽(“발심수행장 강설”, 「수행자의 삶」」중에서
발심은 인생의 소중함을 알고 불법 만난 인연을 감사히 여겨 참으로 의미 있고 보람되고 큰 가치를 누리면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내는 것이죠. 다음 생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발심 수행입니다. 발심 수행은 일체중생에게 이익이 되고자 수행하는 것입니다. 염불을 하든지 진언을 하든지 화두를 들든지 기질과 인연에 따라 하는 것이며, 다만 나[我]를 버리고 일체중생의 이익이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발심을 바탕에 두고 정진해 나가면 나날이 지혜와 자비심은 증장하고, 마음과 몸이 안락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발심수행장 강설”, 「수행자의 삶」」중에서
세속에서는 그 어떤 일보다 남을 돕는 일에 진력하라고 합니다.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요, 작은 선행이 모여 큰 복전을 이룰 것이라고 말하죠. 그러나 불교에서는 복 짓는 일과 도 닦는 일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복 짓는 일보다는 생사라는 일대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 닦는 일을 급선무로 봅니다. 누구를 위해서, 누구 집이 어려워서, 누가 곤경에 처해서, 누가 초상이 나서, 누가 아파서 등 수많은 인정에 꺼들리다 보면 자기 도 닦는 일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도 닦을 시간에 도를 닦지 못하게 되어 결국 다시 윤회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자경문 강설”, 「자경십문」」중에서
지극한 도란 가장 이상적인 삶, 영원한 행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삶이 어렵지 않다는 거죠. 모든 분별심을 여의고 평등심만 회복하면 됩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이 본래 공하기 때문입니다. 환화공상(幻化空相)이죠. 우리의 마음이 크고 둥근 거울과 같다는 겁니다. 거울은 친소, 주객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물을 비추잖아요. 남자가 서도 비춰 주고, 여자가 서도 비춰 줍니다. 도둑이 서도 비춰 주고, 선행을 잘하는 사람이 서도 비춰 주죠.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본래 공한 자리에 서면 피차와 친소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경문 강설”, 「자경십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