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사산함으로써 앤 불린의 운명은 종착지에 다다랐다. 그녀는 헨리 8세를 해하려는 역모를 꾸몄으며, 간통을 무려 22차례나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앤은 런던탑에 감금되었다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헨리 8세는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딸을 사생아라 선언한 뒤 1536년 5월 19일 앤을 참수형에 처했다. 채 세 살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를 잃은 엘리자베스가 언제, 어떻게 그 끔찍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무척 조숙한 아이였던 터라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재빨리 눈치 채고는 어느 날 자신을 돌보는 사람에게 왜 더 이상 레이디 프린세스(공주마마)라 부르지 않고 레이디 엘리자베스라 하는지 물었다고 한다. 이 무렵 엘리자베스는 친구인 로버트 더들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어."---1장 잉글랜드에서 가장 잉글랜드 인다운 여성
엘리자베스는 남성들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의 성별로 인한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켜 십분 활용했다. 여성이라는 점을 내세워 신하들로부터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킨 뒤 마음대로 조종하곤 했던 것이다. 또, 남자들에게 추파를 던질 때도 철저한 계산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누구든 자신에게 헌신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그들 사이에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켜 궁정 내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했다. 그녀는 군주인 자신에게 일반적인 사회 규범을 적용시킬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베네치아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성별이 내 특권을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녀는 유능한 통치자임을 입증하여 결국 편견을 뛰어넘는 데 성공했고, 신하들도 그녀를 가장 위대한 군주라 칭송하게 되었다. 그녀는 분명 국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군주였다. 스스로를 전설적인 인물로 포장하는 데 있어 여자라는 사실은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녀를 예찬하는 무리들 사이에서 엘리자베스는 ‘로자 일렉타’, 즉 선택받은 장미라 불리며 거의 신격화되었다. ---13장 글로리아나
엘리자베스와 더들리의 사랑이 진심이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이어진 사랑이었다. 더들리가 보낸 편지에 담긴 신실함, 따뜻함이 묻어나는 말투,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누가 보아도 자명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무뚝뚝하고 거만했지만, 여왕과 함께 있을 때면 사근사근하기 그지없었다. 붉은 머리 여성을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밝혔던 그는 여왕과 분명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 감정이 아무 사심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사랑이었다고 볼 수만은 없겠으나 여왕 또한 그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으니 피차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물론 여왕도 ‘늘 외모로 사람을 평가했던 터라’ 그의 출중한 생김새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그의 배짱과 모험심, 남성다운 강인함 등을 높이 샀다.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을 길들여 완벽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며 뿌듯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에게 있어 더들리는 바람직한 남성상 그 자체였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원기가 치솟았고, 그리하여 반드시 날마다 만나야 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서신마다 그는 자신을 여왕의 ‘눈’이라 칭했는데, 이는 여왕이 직접 붙여준 별명이었으며, 이때부터 서명에 동그라미 두 개와 직선 두 개로 눈 모양 암호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4장 사랑스러운 로빈
해적 드레이크의 전리품과 흥미진진한 모험에 관한 소식은 곧 엘리자베스 여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녀는 펠리페 왕이 봉변을 당하고 길길이 날뛰었을 생각에 환성을 올리면서 드레이크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하룻밤 새 드레이크는 잉글랜드의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고, 에스파냐에서는 ‘엘 드라크,’ 즉 용이란 별칭까지 얻으며 악당 취급을 받게 되었다. 에스파냐 측에서는 거세게 항의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염려하는 흉내만 낼 뿐 이러한 범죄 행위를 억지하기 위한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탈한 보물로 자신의 재산을 불려나가고 있었다. 1577년 말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펠리컨 호를 타고 역사적인 세계 일주에 나섰다. ......
여왕은 그를 보자마자 반갑게 말을 건넸다. “드레이크! 이제 에스파냐 왕으로부터 내가 받았던 무수한 수모를 그대가 한꺼번에 갚아주겠구나.” 그는 인도 제도에서 펠리페의 배와 식민지를 공격하자고 제의했고, 엘리자베스도 이에 적극 동의했다. ...... 드레이크가 출발하기 직전 왕실 전령이 찾아와 여왕의 선물을 전달했다. 여왕이 손수 ‘주께서 마지막까지 그대를 인도하고 지켜주시기를’이란 문구를 수놓은 항해용 모자와 실크 스카프였다. ---17장 화려한 휴가
여왕은 ‘남자 없이 살 수 없는 여자’였다. ...... 엘리자베스와 남자 궁정인들의 관계를 통해 당대의 전형적인 구애 방식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감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고귀한 여인을 그저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궁정인들이 여왕에게 보냈던 서신은 연애편지에 가까웠다. ...... 이 모두가 전적으로 궁정인들의 아첨이었다거나 엘리자베스의 자기만족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녀에게는 실제로 남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안절부절못하며 곁을 맴돌게 만드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도 같았다. 농담을 던지고 장난을 걸고 허물없이 굴다가도 갑자기 근엄하고 쌀쌀맞게 돌변했다. 다시 말해 궁정이란 무대에서 위대한 프리마돈나의 역을 도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뛰어난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옥스퍼드 백작이 그녀의 앞에서 절을 하다 방귀를 뀌자 수치심에 무려 7년간이나 궁 출입을 하지 않고 두문불출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여왕은 따뜻하게 환대하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백작, 나는 방귀 따위는 다 잊었네.” ---14장 유쾌하고 기품 있고 화려한 궁정
그날 에스파냐 함대는 칼레에 정박했다. 잉글랜드 군은 칼레까지 에스파냐 함대를 쫓아갔다. 7월 28일 자정에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화공선 다섯 척이 에스파냐 전함 틈바구니로 들어갔다. 불길은 강한 바람을 타고 급속히 퍼지며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에스파냐 함대가 불길을 피해 뿔뿔이 흩어지면서 전투 대형이 와해되었고, 워낙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다시 모이기도 불가능했다. 이제 규모가 작은 잉글랜드 전함들이 동등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에스파냐 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7월 29일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그레이브라인 부근에서 마지막 결전이 벌어지기 전에 영웅적으로 전열 정비에 나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수적으로 우세해진 잉글랜드 함대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고, 여세를 몰아 에스파냐를 압박해왔다. 에스파냐 측은 전함 열한 척과 병사 2천 명을 잃은 반면 잉글랜드의 인명 피해는 50 명에 불과했다.
---22장 위풍당당 일라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