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공자 : 인의 이념과 예의 실천
-공자가 중시했던 예(禮)는 원래 군자(君子)라는 지배층이 익혀야 하는 일종의 예의범절을 의미했다. 그는 군자가 예를 익히면, 소인(小人)으로 불리는 일반 백성들이 군자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된다고 확신하였다.
-공자는 예(禮)를 배워서 익숙하게 내면화할 수 있으면 우리에게 인(仁)이라는 품성이 갖추어진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바로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말한 것의 의미이기도 하다. 공자에게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와 인의 의미가 보다 보편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공자는 타자와 관계하는 일종의 도덕명령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것이 바로 서(恕)라는 가르침이다. 공자가 말한 서(恕)의 원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라는 준칙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예(禮)와 인(仁)은 공자에게서 절대적인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다해서라도 이 두 가치를 지켜야 한다며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를 역설하였다.
2장 맹자 : 측은지심의 발견으로 유학의 수양론을 만들다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동정심을 발견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선하다고 논증하였다. 이것이 바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가진 의미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보는 성선설은 맹자의 수양론을 정당화해준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우리가 이 선한 본성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때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옹호하기 위해 논쟁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가 옹호하려고 했던 것은 자신의 성선설이었다. 그는 주나라 예를 중시한 공자와 달리 인간 마음속에 깃든 본성을 관찰하라고 했다. 이로부터 예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본 공자의 정신이 변형을 겪게 된다.
-정치적으로 맹자는 과감한 혁명론을 피력한다. 인격적 수양이 되지 않은 군주는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폐위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오직 자신의 선한 본성을 제대로 수양한 사람만이 위정자가 될 수 있다는 왕도정치론이 탄생했다.
3장 순자 : 욕망의 발견과 유학의 정치화
-순자는 자연질서[天]와 인간문명[人]을 뚜렷하게 구분하면서, 인간문명이 가진 능동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유학의 관념 가운데 하나였던 천명론(天命論)을 부정한 것이다. 순자는 유학에 남겨진 종교성을 밑바닥에서부터 공격한 일종의 경험론적 자유주의자였다.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하면서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다. 그러나 순자가 진정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은 본성[性]보다는 인위[僞]라는 개념이었다. 그는 인간이 선하려면 인위적인 학습과 후천적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본성을 무질서하다고 본 순자는 공자의 예(禮)를 다각도에서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그가 본 예의 의미는 하나는 정치경제학적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단심리학적인 것이었다. 전자는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지만 재화가 부족하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예(禮)를 만들어 욕망을 억제했다고 보는 것이다. 후자는 백성들의 심리적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 통치자가 다양한 예식을 치른다고 보는 것이다.
4장 장재와 정호 · 정이 형제 : 우주가족의 구상과 성인에 대한 열망
-장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기(氣)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한 그것들이 최종적으로 기(氣)로 되돌아간다고 생각하였다. 마치 물속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얼음들이 만들어지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녹아서 다시 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정호는 공자가 말한 인(仁)이라는 개념을 다시 숙고한다. 그에게 있어 인(仁)이란 외부의 사물을 자신의 몸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고 반응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정호가 ‘만물일체(萬物一體)’라는 주장, 즉 ‘만물은 모두 하나의 몸’이라는 주장을 펼쳤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호의 친동생이었던 정이는, 유학자가 공부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되려는 데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그는 성인이 될 수 있는 본성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본성으로부터 드러나는 감정이 지나치면, 선한 본성마저 고갈될 것이다. 마치 우물의 물을 너무 길어내면 우물 물 자체가 마르는 것처럼. 그래서 그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잘 조절할 것을 당부한다.
5장 주희 : 하나의 달과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수많은 달빛
-주희는 장재와 정호 ·정이 형제들이 시작한 새로운 유학 운동을 체계화한다. 주희는 우주가족이나 만물일체의 이념을 그대로 계승하여 신유학을 집대성한다.
-주희의 형이상학 체계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로 잘 설명될 수 있다. ‘월인천강’은 하나의 밝은 달이 천 개의 강에 동시에 달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비유는 인간이나 모든 사물들이 하나의 초월적인 이(理), 즉 태극(太極)이라는 절대적 원리를 자기안에 본성으로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각각의 내재적인 이(理)이다.
-주희는 성인이 되려면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이(理)를 직관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양한 사물들이 갖고 있는 이(理)를 탐구하여 초월적 이(理)에 이르는 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공부 방법이다. 반면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본성[性]을 함양함으로써 초월적 이(理)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바로 미발(未發) 때의 함양 공부이다.
-주희는 말년에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이라는 새로운 심론과 수양론을 제안하게 된다. 이 논의에 따르면 인간은 인심과 도심, 즉 현실적 마음과 윤리적 마음의 갈등 때문에 괴로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주희는 도덕적 마음인 도심이 항상 인심을 지배하고 조절할 수 있도록 수양할 것을 강조하였다.
6장 왕수인 : 세계는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왕수인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나온 주장이 바로 “마음과 무관한 사물은 없다”라는 독특한 주장이다. 물론 이것은 세상에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물의 가치와 의미는 내 마음을 떠나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왕수인은 윤리 법칙도 내 마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효(孝)라는 이(理)는 내 마음에 있는 것이지, 부모님이라는 대상 속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왕수인은 이러한 예를 통해 ‘심즉리(心卽理)’, 즉 ‘마음이 곧 이치’라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왕수인의 가르침은 ‘사구교(四句敎)’, 즉 네 마디로 이루어진 가르침에 압축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아는 반성 능력, 즉 양지(良知)라는 개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양지의 능력을, 구체적 삶에서 실현하는 자세를 그는 ‘치양지(致良知)’의 공부라고 말한다. 이것은 선과 악을 아는 양지를 따라 현실에서 선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7장 이황과 이이 : 주자학을 심화시킨 철학적 논쟁들
-이황은 측은지심 같은 윤리적 마음은 우리 마음속의 이(理)가 저절로 움직여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젊은 유학자 기대승(奇大升)은 이(理)는 절대적 원리로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이(理)가 작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이 점이 바로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의 핵심이었다.
-이이는 기대승의 입장을 따르며 이황의 관점을 비판한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기(氣)밖에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그는 윤리적 마음도 기본적으로는 기(氣)가 드러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이는 사단과 같은 윤리적 마음은 칠정과 같은 일반적 감정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유독 선한 감정만을 가리켜 사단이라고 말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 점은 이이가 기대승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이황, 기대승 그리고 이이에 의해 전개된 ‘사단칠정논쟁’은 주자학을 보다 심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그 후 조선 유학계에서는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 있었다. 이간(李柬)이란 유학자는 사람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이 같다는 입장을 취했고, 한원진(韓元震)이란 유학자는 사람과 동물은 본성이 서로 다르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는 ‘인물성동이논쟁’을 시작하였다.
8장 이토 진사이 : 타자의 발견을 통해 공자를 되살리다
-이토 진사이는 주희로 대표되는 신유학이 공자와 맹자의 본래 정신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본의 유학자이다. 그는 공자와 맹자의 유학 정신을 되찾고자 했기 때문에, 그의 유학 사상을 흔히 고학(古學)이라고 부른다.
-이토 진사이는 주희의 미발 함양 공부를 불교의 공부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는 내면에 갇히게 만드는 함양 공부 혹은 경(敬) 공부로는 외부의 타자와 적절한 윤리적 관계를 맺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토 진사이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같은 선한 마음이 확충되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라는 덕목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인, 의, 예, 지라는 선천적 본성으로부터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나온다고 생각한 중국 신유학들의 입장을 거꾸로 전도시켜버린 것이다.
-이토 진사이는 공자가 강조했던 서(恕)라는 개념도 신유학자들과 다르게 해석한다. 신유학자들은 서(恕)를 “나의 마음을 남에게 이입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이토 진사이는 “(나와 다른) 타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9장 오규 소라이 : 유학에 다시 정치를 도입하다
-오규 소라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형이상학적인 원리를 부정했던 급진적인 일본의 유학자이다. 그는 경험적으로 주어진 다양성과 개별성만을 인정한다. 그가 기질(氣質)이라는 개념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점이다.
-오규 소라이는 신유학의 심성론이나 수양론이 모두 불교의 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원래 고대유학의 정신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신유학자들은 성인(聖人)을 윤리적으로 완성된 인격자로 이야기하지만, 오규 소라이는 성인이란 기본적으로 문명제도를 만든 제작자라고 이해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제도를 통해 정치적 행위를 완성하는 자이기도 하다.
-신유학자들이나 자신의 선배 이토 진사이가 모두 맹자의 유학 사상을 절대적으로 신봉한 것과는 달리, 오규 소라이는 모든 측면에 있어서 순자의 유학 사상을 계승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순자도 기본적으로 유학의 정신을 정치적 영역에서 찾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10장 정약용 : 새로운 유학 체계를 꿈꾼 마지막 대가
-정약용은 19세기에 유행했던 모든 사유 경향들에 맞설 수 있도록 유학 사상에 새로운 체계를 부여했던 인물이었다. 19세기에 동아시아에 유행했던 사유 경향에는 주희의 신유학,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서학 사상, 청나라의 고증학, 일본의 고학 사상 등이 있었다.
-정약용은 이토 진사이처럼 주희의 미발 함양 공부를 불교적이라고 거부한다. 그렇지만 그는 주희가 말년에 제안했던 ‘인심도심설’을 비판적으로 흡수한다. 이로부터 정약용은 인간을 인심과 도심으로 갈등하고 고뇌하는 윤리적 주체로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정약용은 마테오 리치의 서학 사상이 가진 종교적 내용은 거부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자유의지론은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정약용이 강조했던 권형(權衡)이란 개념은 바로 자유의지론에 대한 숙고로부터 출현한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이토 진사이의 근본적인 입장, 즉 인, 의, 예, 지의 네 덕(德)은 윤리적 실천의 결과물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정약용은 이토 진사이와 달리 인간의 성(性)을 단순히 측은지심 같은 사단의 마음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정약용에게 성(性)은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를 즉각적으로 알아서 선을 지향하고 악을 피하려고 하는 선천적인 기호(嗜好)로서 사유되었기 때문이다.
---본문 요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