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너무나 멍청한 내 자신이 싫어서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박고, 피가 날 정도로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그것도 모자라 손톱으로 내 살을 쥐어뜯으며 온몸을 자해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몸에 기운이 다 빠지고 나서야 이 모든 걸 멈출 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 벌렁 자빠져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에 붙은 선풍기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어리석은 영혼은 몸과 분리되어 선풍기와 같이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너무나 어지러웠다. 세상이 너무나 어지러웠다.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소중한 것들은 모두 도난당한 멍청한 나를 보며 선풍기 팬은 비웃듯이 웅웅 소리를 내며 말하고 있었다.
“돌아가라, 멍청하고 나약한 코리안!”(p. 88~89)
02 인도에서 비 쏟아지는 몬순에 버스를 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들이치는 비 때문에 창문을 열 수도 없고, 버스 안은 수많은 사람들의 열기 탓에 한증막을 연상케 한다. 가뜩이나 엉망인 몸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왔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자꾸 몽롱해졌다.
그 순간, 죽을 때 죽더라도 유언은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방에서 일기장을 꺼내 펼쳤다. 그런데 그 일기장에 인도로 출발하기 이틀 전에 친구가 써준 편지가 껴 있었다.
‘갠지스 강에서 죽어가고 있을 너의 모습이 선하구나.
죽지 마.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응?
죽어갈 때 이 글을 읽어라. 그럼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그 편지를 본 순간, 내가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온실 속 화초처럼 좋은 잠자리, 좋은 음식, 따뜻한 방에서만 지내던 내가 빗물에 젖은 손으로 똥구멍을 닦고 마을버스보다 못한 버스에 구겨 앉아서 다 녹아버린 초콜릿을 입에 쑤셔 넣으며 유언이나 쓰겠다고 생각을 하다니…
혼자서 미친 듯이 웃자 버스 운전사를 비롯해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쳐다봤다. 하지만 한동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p. 97~98)
03 오랜 여행을 하면 먹고 싶은 것들의 이름이 머릿속을 끝없이 맴돌고, 평소엔 얼굴조차 마주치기 힘든 사람들의 소중한 이름이 수없이 떠오른다. 그러나 막상 집에 돌아오면 그 ‘소중한 것’들은 순식간에 ‘당연한 것’이 되고, 그리워지는 건 오히려 힘들었던 여행의 기억들이다. (p.117~118)
04 ‘만약 신이 있다면 그는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이 고통을 통해 무엇을 배우라고 하는 걸까?’
신은 내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까지 그 답을 주지 않았다. 아니 이미 나와 있는 답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파도와 맞서려는 생각을 다 버리고 나서야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거친 파도들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것을 멋지게 타는 법은 배울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기에 불현듯 찾아오는 불행의 파도를 미리 알고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멋지게 차는 법은 배울 수 있다. 나는 다시 일어나 바다를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파도가 치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몸을 맡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난 사람처럼 덤비던 파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내 몸을 감싸 안아주었다. 갑자기 신이 났다. ‘젠장, 이렇게 쉽지 않은가. 파도를 멋지게 타는 방법은…’
나는 파도 속에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덩실덩실 춤추며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나의 잠을 설치게 했던 슬픔과 분노는 그 리듬에 맞춰 조금씩 밖으로 새어나갔다.(p.129~130)
05 자원봉사를 이어가던 어느 날, 처음으로 장애 아이를 가슴에 꼭 안은 일이 생겼다. 아루나라는 이름의 귀머거리였다. 절대 감성적으로 대하지 않겠다던 내가 아이를 안은 것이다. 그 아이는 내가 번쩍 안아주자 기쁜지 마구 고함을 질렀다. 말을 할 수 없는 아이였지만 그 아이가 행복해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나 역시도 이유 모르게 행복했다. 아이의 심장 뛰는 소리와 체온, 그리고 사람 냄새.
우리는 다 다르다. 가진 것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며 먹는 것도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안고 있는 순간에 느끼는 행복은 ‘우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p.149)
06 2004년 11월 3일
내일이면 이 학교를 떠난다. 나는 임파니 앞에 앉아서 마음을 다해 마지막으로 열심히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잠정적 작별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내 진심을 전했다.
“임파니, 난 네가 한 번쯤은 살면서 웃을 수 있는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번도 웃은 적 없었던 임파니가 나를 보며 밝게 웃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순간 너무나 놀랍고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임파니가 웃었다고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아마 그렇게 소리쳤으면 다른 사람들은 분명 내가 정신 나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임파니는 떠나기 전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선물을 너무나 커서 자원봉사를 하는 내내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는 나를 울게 만들었다.
안녕…! 인도의 작은 소녀여. (p. 171~172)
07 어렸을 때,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모르는 세상을 빨리 배우고 싶었고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성숙함을 가지고 싶었다. 백지같이 하얀 눈동자와 마음에 빨리빨리 낙서를 해 빽빽이 채워가고 싶었다. 그 땐 왜 몰랐을까? 순수함은 성숙함과 비교할 수 없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p. 186~187)
08 2007년 여름, 남부 카르나타카 주의 험피에서 우린 마법의 주인공이 되었다.
말없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인도 아이 두 명이 우리가 있는 옥상으로 올라왔다. 아니 올라왔다기보다 저 멀리 우주 어디에선가 뚝 떨어진 별처럼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어찌나 깜깜한 밤이었던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아이들의 이름은 비루파샤와 쉬바난다. 유심히 보니 그들 겨드랑이에는 둘둘 만 모포가 있었다. 아무래도 집이 없어서 이곳에서 잠을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그들의 잠자리에 느닷없이 외국인이 점령해 버려 놀란 것 같았다.
우리는 쉬바난다와 비루파샤를 맥주 파티에 초대하기로 했다. 다행히 맥주 안주로 사온 인도산 싸구려 과자가 아이들의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달빛을 받으며 춤추며 하모니카를 부는 우리들이 신기한 듯 지켜보기만 하던 아이들. 맥주가 거의 동이 날 무폅, 비루파샤에 지나가는 말로 부탁한 노래 한마디.
오늘 당신이 내 사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나를 위해 당신은 마법의 세상에서 왔어요.
오, 달콤한 고통이 내 마음을 적시네요.
우리 넷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아이를 쳐다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p. 233~234)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