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제시한 ‘저 너머로부터의 윤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미래가 이미 현재에서?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4:17의 요점으로, 이 구절은 산상수훈 전체를 떠받드는 주춧돌이며, 예수의 말씀 전체를 밀고 나가는 동력이다. “그때를 기점으로 예수께서 ‘회개하라, 하늘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산상수훈과 예수의 설교 속에 재차 나타나는 특징은, 미래가 현재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새 시대가 이미 예수 안에서 도래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일상적인 윤리가 아니며, 단순히 유대교 윤리를 강화하고 확장한 내용도 아니다. … 이 말씀은 그 왕국의 윤리이다. ---「서론」중에서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예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새로운?모세로서 새로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이 가르침은 ‘위로부터의 윤리’에 들어가지만, 이 윤리는 예수와 뗄 수 없이 묶여 있기에 또한 메시아 윤리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서론에서 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예수가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한다는 주제가 복음 이야기의 핵심이다. 복음은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예수의 이야기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며, 산상수훈을 시발점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토라/윤리적 비전이 이제 예수의 윤리적 비전 안에서?그 완성에 도달했다는 복음의 실제로 인도된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맥락(즉, 4:23-25과 9:35)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 맥락을 안내자로 삼으면, 산상수훈 안에서 단순한 윤리적 비전이 아닌 예수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새 백성을 위해 새로운 윤리적 비전을 제시하는?새로운 모세이신 예수 말이다.---「1장」중에서
우리는 여기서 예수가 주장하는 굉장히 지루한 내용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토라와 선지자들이 기다리고 예고했으며 예비단계로 가르쳤던 내용을 (구원역사적, 신학적, 윤리적 측면에서) 성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물론 ‘나는 엘리야처럼 강력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거나, ‘나는 이사야처럼 분명하게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거나, ‘나는 모세처럼 믿기 힘든 이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예수는 그러실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토라와 선지자들을 성취한다’는 주장은 완전히 성격이 다른 주장이다. 그런데 정확히 그런 주장을 예수가 하고 계셨다. 역사 속의?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다. 토라가 그 목표에 도달했다. 이로써 토라는 예수의 모습을 띠게 된다. 예수의 주장은 철저히 유대적이지만(사 2:1-5, 렘 31:31-34), 특별히 메시아적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깨달아야 할 첫 교훈이 이것이다. 즉 예수를 성경의 핵심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바라보라. ---「4장」중에서
나는 의견이 다르다. 물론 바울 자신의 화를 차치해도(갈 3:1을 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화나 예수의 화를 언급하는 본문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 해도 마태복음 5:22 속 예수의 언어를 쉽게 간과해서도 안 되며 그 맥락을 축소시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가 분위기를 조성하고 제자들의 기대치를 끌어올리던 것이 바로 그 맥락 속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화나 살인과 관련해서 제자들이 다른 모습이기를 바라셨다. 그렇다면 예수의 윤리를 설명하는 신약의 틀에 비추어 보면, 최선의 해석은 ‘저 너머로부터의 윤리’라 부를 수 있는 내용이다. 그 왕국이 지금 여기에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지만,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아직 와야 하는 왕국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그러나 아직은 아닌’ 속에 산다. 그 왕국은 어떤?의미에서는 ‘지금’이기 때문에 - 그리고 이 말은 그 왕국의 권능이 이미 발휘되고 있다는 의미이다(성령을 생각해 보라) - 예수의 제자들은 화라는 범죄를 피해야 하며, 또한 화로부터 탈바꿈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만물이 완성되고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는 미래의 하나님 왕국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친교가 융성할 것이기에 화는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화를 금지하는 것은?단순히 과장법이 아니다. 그것은 왕국의 실제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5장」중에서
여기서 예수 윤리의 모양새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메시아 윤리의 상당 부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 신경이다.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불의를 일삼는 상대까지도 사랑할 것이다. 예수 신경을 따라 형성된 사람은?불의에 반응할 때, 복수와 원한이 아닌 은혜와 동정과 풍성한 긍휼로 반응해서, 그 결과 불의를 뒤집어버린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구조적 불의에 저항하고 사랑의 형태를 띤?대안적인 정의를 구현하는 대안 사회를 만들며 산다. 이를 본회퍼보다 더 잘 표현한 사람이 있을까? 사실 그의 마지막 운명도 이 말을 구현하고 있었다. “악이 그 힘을 잃는 순간은, 악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상대가 사라지고, 도리어 상대가 기꺼이 악을 감내하고 겪어내는 순간이다.?악이 도무지 맞상대를 할 수 없는 적을 만난 것이다.---「9장」중에서
우리는 이 기도[주기도문]를 반복해서 낭독하고 암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이름이 가장 큰 영광을 받기를 염원하는 법을 배운다. 또한, (우리의 왕국이 아닌) 하나님의 왕국과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하는?법을 배운다. 그리고 타인의 유익을 열망하고 염원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각 사람이 충분한?음식을 공급받고, 죄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유혹의 덫과 악(혹은?그 악한 자)의 손아귀에서 보호받기를 열망한다. 이렇게 기도를 마치면,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과 타인을 향해서 다시 정돈되며,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대로 변화됨을 알게 된다. 우리가 만들어진 목적은 합당한 사랑을 소유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타인을 향한 사랑을 소유하도록 만들어졌다.?---「13장」중에서
예수의 윤리적 비전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미래에 비추어 삶을 살겠다는 동기다. 말하자면 ‘위로부터의 윤리’이자 ‘저 너머로부터의 윤리’이다.?이 말을 따르자면 우리의 시선은 단순성과 집중 쪽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대신 소비를 줄이고 심지어는 가난에 동참하는 자발적인 행동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성 안토니우스(Saint Anthony)처럼 사막에서 살기 위해서 혹은 같은 소명을 받은 사람들과 게토를 만들고 살기 위해서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를?비롯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일깨우듯이, 재물을 향한 우리의 태도를 예수의 왕국 비전에 비추어 개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왕국 비전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란 의미다. 만약 우리가 재물을 목적으로 살고 있으면서도(실업자를 제외한 부유한 서구 사회를 향해 하는 이야기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는 내어줄 게 없다면, 만약 우리를 위한 예산을 늘리고 이후에 남은 여유분만을 기부한다면, 만약 우리의 소비 행태를 검소하게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의 왕국 비전을 수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15장」중에서
‘저 너머로부터의 윤리’는 성화와 화해 모두를 추구하기에 판단의 태도를 넘어선다. 제자들이 실패했을 때 예수가 제자들을 꾸짖어야 했듯이(14:22-33을 보라), 또한 그는 그들을 용서하고 제자의 길로 다시 불러들였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실패하면 죄를 고백해야 하고, 이어서 제자리로 돌아와 예수를 따라야 한다. 이 본문을 순종하는 데 있어서 핵심은, 기꺼이 자기 성찰과 자기 고백을 하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앞과 서로 앞에서 우리?죄를 고백하라고 늘 가르쳐왔다. 그리고 죄를 정기적으로 고백하는 실천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그 왕국에 함께하는 형제와 자매의 죄에 대해 긍휼한 자세를 가지게 된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침묵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일에 있어 겸손한 자세로 함께 성장해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거룩함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자라고, 개인적, 교회적인 영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진심 어린 정직함과 진정한 성장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가 되어 간다.
---「17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