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조성 동기나 경영 수법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사상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우리나라 정원의 일반적 특징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우리나라의 정원 조성에 사상적 배후가 되는 것 중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유학사상과 성리학, 그리고 도가사상이고, 여기에 신선사상과 풍수사상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한국의 정원 조성에 바탕이 되는 사상들은 궁원이나 향원 도처에서 직접·간접적인 방법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한국 전통 정원 전체를 지배하는 일관된 흐름은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자연주의 사상이라 할 것이다.
1) 유교사상
유교 철학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치와 생활의 근본이념이었으며, 특히 출처지의出處之義는 선비된 사람이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고 굳게 믿어졌다. 향리의 별서는 유교사상을 고스란히 담아 선비된 도리를 지키며 수신修身하는 은거지의 성격을 보여주는 곳으로 낙향한 선비들에게 있어서 별서는 정신적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이상적 생활공간이었다. 해남 보길도의 부용동 정원과, 담양의 소쇄원, 그리고 강진의 다산초당 등은 출처지의를 중요시하던 당시의 선비들의 마음이 담긴 정원이다.
2) 성리학적 요소
격물치지를 목표로 하는 성리학은 이理와 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의 생성과 구조, 인간 심성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성리학과 관련된 요소들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정원 도처에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는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 연못으로 외곽이 사각형인 연못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꾸며놓은 것을 말하는데, 이 형태의 연못은 우주의 생성과 구조의 원리, 즉 천원지방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3) 도가사상
옛 선비들은 내심 욕심없이 고요한 상태로 무위자연을 노래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삼았고, 시정市井보다 산림·전원·강호의 자연을 노래하는 것을 낙으로 여겼다. 특히 별서정원에 은거하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영양 서석지 정원의 경우, 정원수의 90%를 낙엽활엽수로 심고, 자연스럽고 수수한 멋을 추구하였는데, 자연순응적인 가치관을 잘 드러내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4) 신선사상
인간의 욕망 가운데서 가장 원초적이고 절실한 것은 아마도 죽지 않고 사는 일일 것이다. 도교는 현실에서의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것이 신앙의 근간으로 이러한 도교사상 또한 한국 전통 정원에 잘 드러나 있다. 신선사상과 관련된 대표적인 경물은 삼신산 또는 삼신선도이다. 이는 정원의 일부분이나 연못 속에 세 개의 산, 혹은 세 개의 섬을 인공적으로 꾸며놓은 것을 말하는데 경주 안압지 정원이나 부여 궁남지 연못에 조성된 삼신산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외에도 거북바위, 봉황바위, 학바위, 토끼와 거북 장식 등이 신선사상과 연관 있는 경물이다.
5) 풍수사상
풍수사상은 도읍이나 마을 터를 정할 때뿐 아니라 정원의 터 선택, 건물이나 정원수의 배치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명당터를 점지함으로써 가문의 부귀와 자손의 번창을 추구하는 전통적 기복사상의 하나이다. 대표적인 예로 경복궁은 북악산에서 남류해 온 물길을 서쪽 영추문에서 동쪽으로 꺾여 흐르게 했고, 창덕궁의 경우는 서쪽 돈화문 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게 물길을 잡았다. 이것은 서류동입하는 물길이 수윤의 성덕을 가져다준다는 명당수의 개념을 인위적으로 궁원에 적용한 예이다.
정원을 구성하고 있는 경물들 하나 하나는 옛 사람들이 믿었고 생각했고 실천했던 내용을 현세에 전달해 주는 매개체이다. 이 매개체를 통하여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바르게 읽어낼 때 정원 자체는 물론 그에 얽힌 옛 사람들의 사상과 생활철학을 느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 열릴 것이다.
1) 연꽃과 연못
방지원도형의 연못은 동양 고래의 우주관 내지 자연관인 '천원지방'과 관련되어 있다. 곧 전통 정원 속의 방지원도형 연못은 우주의 존재·운행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본성은 연못을 가득 채운 맑은 물처럼, 그리고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때가 묻지 않는 연꽃처럼 근본적으로 맑고 깨끗한 것이며, 선비들에게 있어서 연꽃은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의 모습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정원 속에 방지원도형 연못을 조성하고 거기에 연꽃을 즐겨 심었던 것이다.
2) 삼신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 영생을 누리고 싶어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한정된 수명과 현실적 제약을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생을 누릴 수 있는 이상 세계를 갈망하였고, 그러한 욕망이 삼신산 전설을 낳았다. 삼신산은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상의 세계요, 신령의 세계이기에, 옛 사람들은 이를 정원 속에 구축하여 정원을 신선계로 탈바꿈시키고자 하였다.
3) 무산십이봉
열두 봉우리가 있는 무산은 중국 사천성 기주 무산현에 있는 실재의 산인데, 그 산에 선녀가 살고 있다는 전설에 때문에 선산仙山으로 신비화되었다. 따라서 정원 속의 무산은 신선이 사는 선경을 상징하며, 무산십이봉을 정원의 경물로 조성한 것은 현실 공간에 선계를 구현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외형만 보면 그저 평범한 바위 열두 개인데, 옛 사람은 그 속에서 무산의 환상적인 모습을 보았고, 신선들이 노니는 모습을 상상했던 것이다.
4) 바위와 괴석
바위는 겉보기에 그저 평범할 뿐 아무 관심을 끌 만한 요소가 없어 보이지만, 동양의 옛 사람들은 평범한 바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원을 조성할 때 자연 상태의 바위를 본래 모습대로 정원 속에 포함시키려 했고, 그렇지 않으면 괴석을 옮겨다 배치하기도 했다. 정원에 있는 괴석이나 돌에 낀 이끼도 보고, 떨어지는 낙엽도 보며 대자연의 정취를 즐기곤 했다. 이처럼 바위는 정원 전체 공간을 산수화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5) 지주중류석과 백세청풍석각
원래 지주는 중국 하남성 섬주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황하의 중류에 있는 기둥 모양의 돌을 말한다. 위가 판판하여 숫돌 같은 모양인데, 격류 속에서 우뚝 솟아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을 사람들은 곧잘 선비의 지조에 비유하였다. '지주중류'와 짝을 이루는 글귀는 '백세청풍'으로 이 또한 절의와 명분을 중히 여겼던 옛 선비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된 석각 유적들이다.
6) 유배거
유배거란 정원에서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시설을 말한다. 유상곡수연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그 잔이 자기 앞으로 당도하기 전에 운에 맞추어 시를 짓고 즐기는 풍류놀이로 우리나라에서도 곡수연이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의 곡수연에 관한 기록은 인조 때의 문인 홍석기의 《만주유집》을 비롯한 여러 문집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처럼 유상곡수연은 시흥과 취흥을 즐기는 풍류놀이로서 옛 선비들 사이에 애호되었다.
7) 잉어 조각상
민화에서 한 쌍의 잉어를 그린 것은 성적인 것과 관련된 부부화락의 상징형 외에 여러 의미를 지니나 창덕궁 후원 부용지의 석축에 새겨진 잉어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연못 축대의 잉어와 어수문의 용조각, 그리고 주합루 돌계단의 문양들은 등용문에 대한 관념과 입신출세의 영달을 시각화한 것이다. 비록 작은 장식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부용지 일대 공간이 전시殿試를 치르던 곳임을 암시해 준다.
8) 두꺼비와 토끼 조각상
사람들은 상상 속의 선계이자 이상향인 월궁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했으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월궁을 현실 속에 나타내고자 했다. 광한루 연못가에 있는 돌로 만든 큼직한 자라, 광한루 기둥 위 자라 등에 올라타고 있는 토끼 형상, 그리고 창덕궁 후원 연경당 앞 석분의 두꺼비 등 이 모든 것들은 정원이라는 현실 공간을 선계로 구현하기 위한 묘책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9)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공자의 행적과 관련되어 있는 나무로, 공자는 행단 위에 앉고 제자는 곁에서 강학했다는 고사와 관련되어 있다. 이후에 행단은 공자의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를 의미하므로 정원에 은행나무를 심어 공자의 행적과 사상을 상기하고 학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0) 소나무·대나무·매화
소나무·대나무·매화는 세한삼우라는 이름으로 시화와 정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목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옛 사람들이 이 나무를 특별히 애호했던 까닭은 그것이 지닌 상징적 의미 때문이었다. 소나무는 지조나 의리의 상징형으로 은자들의 세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불로장생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으면서도 군자의 인품에 비유될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성(강인함, 겸허, 지조, 절개)을 갖추었고, 매화는 추위가 덜 가신, 잔설이 분분한 초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특성으로 선비들의 유교적 윤리관과 결합하여 의인화되고, 또 이상화되면서 정원수로서 빼놓을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정자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멋의 중심에 놓인다. 자연 풍광 속에 정자가 있고 그곳에 머물면서 즐기는 사람이 있을 때 주변의 자연은 어느덧 정원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자연 정원에서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떼, 물 위에 비치는 붉은 단풍과 원산, 송림, 죽림은 물론이고 떠다니는 구름, 공산에 걸린 달, 그리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 솔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까지 모든 것이 정원을 구성하는 요소이자 감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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