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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의 비밀

한시의 비밀

: 시경과 초사편

[ 양장 ] 서강인문정신-014이동
김근 | 소나무 | 2008년 01월 03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7 리뷰 3건 | 판매지수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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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1월 03일
쪽수, 무게, 크기 327쪽 | 724g | 155*233*30mm
ISBN13 9788971396148
ISBN10 897139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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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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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터뷰 중에서
■ 『한자는 중국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욕망하는 천자문』에 이은 권력과 문화의 관계를 구명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이 책에서 특히 어떤 점에 중점을 두어 저술하셨습니까?
이 책에서 내가 특별히 득의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이성적인 인물로 여겨온 공자를 매우 감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파악한 점이다. 다시 말해 공자는 사상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요, 음악가였다는 것이다. 이 점은 책에서 자세히 분석해 놓고 있지만, 공자를 감성적인 사람으로 전제를 해야 그의 언행들에 대하여 수긍이 간다. 공자를 이성적인 인물로 그린 것은 후대 유학자들의 왜곡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지만, 그 ‘공자’는 바로 후대 유학자들이 자신들의 수요에 따라서 만들어낸 공자이다. 그래서 이치로 철저하게 무장시킨 공자이기 때문에 그 이치가 사람들을 억압함으로써 ‘그가 죽어야 우리가 산다’는 이상한 역설이 사람들을 현혹시켰던 것이다.

공자가 “순임금의 음악을 듣고는 석달 동안 고기 맛을 잊었다”라든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등의 언행이 수긍되는 것은 바로 이 흥을 느낄 줄 아는 감성 때문이다. 따라서 흥에 죽고 사는 사람이라면 존재론적 삶을 뒤흔드는 문제에 대하여 굴원처럼 죽음으로 맞서는 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노래의 이 위대한 힘을 중국인들은 일찍부터 파악했기 때문에, 훈고라는 형식을 만들어 음악을 길들여왔던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 문학과 권력의 관계를 집중 연구하시게 된 이유가 있는지요?
근자에 들어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의 죽음’을 거론하면서 인문학이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하는 세태를 걱정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문학에 대한 냉대는 특히 심하다. 그러나 인문학, 특히 문학이 유사 이래 권력의 관심과 환대를 받은 적은 별로 없다. 단지 오늘날 돈이 지고지상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 자본 권력 하에서 특히나 돈이 안 되는 문학이 더욱 홀대 받는 것이 좀 드러나기 때문에 심한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권력은 문학을 억압하는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문학은 개성이라는 존재자를 통해서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주체를 탄생시키므로, 특정 집단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유지되는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문학은 자신들의 기반을 흔들어대는 체제 도전자가 된다. 그러므로 권력은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서 문학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오늘날 중국과 유럽이라는 세계의 두 대륙을 보면, 전자는 몇 천 년 동안 단일한 국가 권력 체제를 유지해오고 있고, 후자는 작은 나라들로 수없이 분열해온 양상으로 발전해왔다. 인간이 개성적인 주체라면 그들이 형성하는 사회도 다양한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유럽의 분열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 넓은 땅과 인구, 그리고 많은 언어와 종족들이 혼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통일된 체제를 유지해온 것은 분명 전체주의를 가능케 하는 어떤 기획이 있었을 것이다. 그 기획은 개성의 통제에 기반을 두었을 터인즉, 이는 언어에 대한 통제로부터 시작하였을 것이고, 그 구체적인 작업은 문학의 장악과 통제로 현실화됐을 것이다. 문학이란 개성의 중요한 한 양태가 아니던가? 이 추측은 중국 문학사에 대한 통찰을 통하여 확신을 갖게 되었다.

■ 들뢰즈, 라캉, 지젝 등을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중국 고전 문학을 서양의 최근 방법론으로 분석하면 새로운 점도 많이 보일 것 같습니다. 과연 어떤 점이 새로운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나는 중국 시에 대한 접근에서 서양 철학을 도구로 사용하였다. 물론 문학이 기본적으로 분절되지 않은 감각 위에 서있다는 점에서 개념으로 카오스에 접근하는 철학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감각은 분절되지 않으면 감응으로 느껴지기 힘들다. 그래서 감각을 분절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학의 이해를 위해서는 철학의 도움만 받을 뿐 거기에 완전히 의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혼돈칠규混沌七竅처럼 감각을 분절해놓으면 파편만 남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장자의 득의망언得意忘言처럼 철학을 도구로 감응을 얻은 후에는 철학은 잊어야 한다. 라캉과 지젝의 철학은 부정의 철학이므로 나는 그들로부터 전복성과 아울러 사물에 유물론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배웠다.

우리나라의 중국문학은 훈고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면서 문학(시)을 훈고, 또는 형이상학적 해석의 차원에서만 감상해왔지,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주체를 생성시키고 변화시켜왔는지,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어떠한 정치적 의미를 띠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은 전복성과 유물적 안목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 한 축은 니체와 들뢰즈인데 이들은 긍정의 철학이다. 중국 고전시의 진정한 힘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해서는 훈고와 해석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이는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상호 작용들에 의해 가능한데, 이는 그간 등한시해왔던 시의 형식에 대하여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중국의 도, 또는 이치 중심주의는 형식을 주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 형식을 제 자리로 돌려놓는 것은 이들 철학의 힘이 매우 주효하였다.

■ 그러나 전통적인 관점을 고수하는 사람들로부터 비판도 많을 것 같습니다. 이 점 책의 저자로서 어떻게 설명하시겠는지요?
그간 내가 몇 권의 책을 낼 때마다 그들로부터 그런 비판을 많이 받아왔다. 비판의 요지는 왜 굳이 서양인의 관점에서만, 또는 서양이론을 끌어들여서 중국이나 동아시아를 보려 하느냐는 것이다. 내가 볼 때 그들이 나를 비판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소위 학문 권력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학문 방법은 이미 전통적으로 고수돼 내려와서 굳건한 토대를 갖춘 권력이 된 상태인데, 자꾸 이상한 담론들이 나타나 기반을 흔들어대기 때문이다. 소장학자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기 때문에 이런 담론들이 자꾸 등장하면 권력의 문하들을 추스리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자신들도 새로운 방식으로 나서자니 새로이 공부하기도 힘들고 또한 권력의 기간을 이루고 있는 중견들이 걸음마부터 시작하자니 영 꼴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대안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하는 식으로 비판, 고수하는 것이다.

내가 서양의 이론을 도구로 삼는 것은 그들의 것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니체의 말대로 관점의 이행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삶은 기실 마찬가지이다. 단지 삶의 토대가 다르기 때문에 보는 안목과 관점이 다른 것뿐이다. 우리의 삶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보고 다양하게 경험하자는데 뭐가 잘못인가? 단순한 예로 우리 음식이 좋은지는 외국에 나가서 오랜 기간 외국음식만 먹고 살아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 아닌가? 네것, 내것을 굳이 따지자면 서양에서 들여온 탈것의 형식인 자동차는 왜 타고 다니는가? 내것이 좋으면 달구지나 타고 다닐 것이지. 이제 자동차는 인류의 것이지 네 것도 내 것도 아니다.

문학은 삶 자체이다. 이 삶을 인식하고 또한 그 삶의 과잉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관점의 이행이 필연적이다. 아주 단순한 예로 갓난아기에게 ‘까아꿍’이나 ‘없~다’와 ‘있~다’하며 숨었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면 아이는 무척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게 문학의 추형雛形이라면 억지일까? 서양의 학자들이 동양의 관점이나 사상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텍스트를 연구하는 것 역시 동양의 것이 우수해서라기보다는 다른 관점에서 자신들의 삶 앞에 놓여진 새로운 모습을 보기 위한 것이다.

나는 지금껏 이런 식으로 연구생활을 해왔는데, 내가 얻은 결론은 서양인들의 것이나 동양의 것이나 삶은 기실 같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중국에서는 노자가 느닷없이 직관적으로 ‘삶은 무無’라고 정의했다면, 서양에서는 많은 지혜자들이 이리저리 돌고돌아 삶을 언어로 분석한 결과, 존재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냈던 것이다. 우리는 삶은 무라는 것을 이미 오래 전에 직감하였지만, 왜 무가 되는지에 대한 논리적 증명은 하지 못했는데, 이제 그들의 수고 덕분에 그 논리적 과정을 알게 된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가?

■ 시 자체가 존립을 위협 받고 있는 세계화 시대는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시의 부활을 위한 의견이 있으시면?
맹자가 일찍이 “천자의 흔적이 사라지자 『시』가 없어졌고, 『시』가 없어진 다음에 『춘추』가 지어졌다.”(王者之迹熄而詩亡, 詩亡然後春秋作)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여기서 천자의 흔적이란 타산적으로 머리를 굴리지 않고 순전히 감성만으로 소통을 하던 옛날의 이상적 사회를 가리킨다. 감성만으로 소통한다는 말은 곧 상호 신뢰의 바탕에서 소통한다는 뜻이므로, 시는 바로 서로 믿음,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인 삶의 바탕 위에서 소통하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시는 분절되지 않은 카오스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의 말은 이런 이상적 사회가 사라지면서 불신이 생겨나고 이 불신 때문에 더는 모호한 감성에 의지한 소통방식을 믿지 못하겠으므로 좀더 확실한 의사를 담보하기 위한 대안이 산문, 곧 『춘추』인 것이다.

맹자의 이 원리가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최고 가치이고 또한 돈 버는 학문이 최고 인기학문인 오늘날은 더 투명한 것을 요구하기 위하여 산문화에서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는 계량화로 발전하였다. 오늘날의 디지털 문화는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숫자로 환산할 수 있으려면 확실하게 분절될 수 있는 유리수만 갖고 의미를 만들어야지, 분절되지 않는 유리수와 유리수 사이의 무리수는 폐기돼야 한다. 모호한 것은 절대 믿지 못하겠다는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카오스를 지향하는 시가 읽힐 리 만무하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무리수에 해당하는 부분이 모호하다는 핑계로 폐기한다고 해서 삶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상징계 안에서는 확실한 것들이 추구될 수 있을지 몰라도 상징계가 실재계로부터 건져 올린 현실 체제인 이상, 실재계는 하시라도 이 확실한 상징계를 느닷없이 돌풍처럼 침범할 준비가 돼있다. 삶에서 폐기된 무리수 부분을 복원하고 또 돌풍 같은 실재계의 침범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유연한 사유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대안이 바로 시인 것이다.

“시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라고 질문했는데, 아무리 디지털 만능시대가 된다 하더라고 인간의 삶의 욕망 자체가 자아의 확장, 니체의 말을 빌자면 “역능에의 의지”에 있고 또한 언어가 존재하는 한, 시가 없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실재계로부터의 침범(라캉의 말을 빌자면 ‘투케’)을 방어하는 길은 언어, 그중에서도 언어예술의 형식인 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른 유흥사업에는 흥망성쇠가 있어도 노래방 사업만큼은 변함없이 호황을 누리는 것은 디지털로 꽉 짜인 철저한 상징계의 사회에서 폐기된 무리수 부분을 잠시나마 회복할 수 있는 도피처가 되기 때문이다. 노래가 끊임없이 불린다는 것은 시가 살 수 있는 토양은 언제나 구비돼 있다는 뜻이다. 이제 유행가 수준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훌륭한 시가 나오는 일만 남은 것이다.

■ 자신의 연구를 스스로 자평하신다면? 솔직히 답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 책이나 논문을 읽은 사람들은 인용된 저작들이 몇 권 안 된다는 지적을 종종 한다. 근대성이 지배하던 지난 한 때 학문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이 훌륭하다고 여기고 책벌레가 존중받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일부 학계에는 아직도 이런 강박관념이 남아서 무조건 많이 읽고 인용을 많이 하라고 가르치는 학자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문학이 재미없고 무익한 학문이 되어 아무도 읽지 않는 그야말로 인문학의 죽음을 선포하기에 이른 게 아닌가 싶다.

학문이나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삶의 감응에서 비롯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자나 작가는 무엇보다 먼저 삶을 고뇌해야 한다. 정금이 나오려면 고통스런 제련 과정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과정에서 옛날 선인들의 텍스트를 읽고 공감하는 일일 텐데, 성경 전도서에도 말했듯이, 해 아래 새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선인들과 같은 고뇌를 하고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반복할 뿐이다. 새로운 텍스트의 창조라는 것도 결국은 텍스트의 이동이라고 하지 않던가? 단지 오늘의 언어로, 또는 코드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를 테면, 도연명의 “여기에 진실한 뜻 있지만 / 말하려다 어느새 할 말을 잊는다(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동서고금의 도서를 다 읽고 인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도연명의 고뇌를 오늘날 내가 함께 했다면 그에 대한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즉 도연명의 고뇌에 얼마만큼 깊이 관여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도연명을 연구한 옛날 학자들을 얼마만큼 읽고 인용했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묵은 관점이라면 우리는 영영 도연명을 넘지 못할 것이리라. 좀 과장되게 말해서 『논어』의 “일흔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도를 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逾矩)”라는 시적 표현만 이해해도 『논어』를 다 읽지 않고도 공자를 진정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대성이 지배하던 옛날에는 넓게 많이 인용하는 게 학자였을지는 몰라도 정보와 지식이 넘치는 오늘날에는 텍스트의 한 구절이라도 깊이 있게 천착해서 중요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학자의 덕목인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나의 책을 읽어 내려간다면 나의 고뇌에 동참하면서 삶의 이해에 공감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결국 모든 지식은 삶에 초점에 맞춰져 있어야지 지식을 위한 지식이라든가 많은 지식에 대한 자랑이 된다면 독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것이다. 요즘 대학들이 실용학문이란 말을 자주 거론하는데, 학문 치고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이 어디 있겠는가? 다 삶에 필요해서 생긴 것 아니겠는가? 단지 지식을 다루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자신들만이 아는 코드로 현학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실용학문이란 이름으로 일종의 말도 안 되는 반란을 일으켜 기존의 학문을 따돌림 시킨 것이 아닌가? 궁극적으로 학문이 현실의 문제에 늘 간여하지 않으면 독자들은 떠나게 돼 있다.

■ 이 책이 우리 사회에 주는 메시지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 민족도 매우 감성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언행을 비롯한 문화 속에는 이성적 관점에서 보면 비합리적인 현상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러한 비합리성의 합리성이 바로 대표적인 감성의 논리이다. 우리의 역사를 보더라도 지배 계급에게 그렇게 착취를 당해도 원망도 없이 무던히 참아내면서도, 외적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위태해지면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간 위정자들을 탓하기는커녕 오히려 분연히 일어나 맨손으로 싸워 나라를 지킨 예가 부지기수 아니던가?

나는 이러한 감성이 바로 노래를 좋아하는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노래를 언제나 우리를 원초적인 존재로 회귀시키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 신라의 서라벌을 묘사하면서 일 년 내내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부르고 즐기는 노래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기이하게 보였으면 이것을 특별히 기록하였겠는가? 우리의 정치사가 다이내믹하고 또한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 내에 민주주의를 이룩한 것은 바로 노래에서 느껴지는 흥 때문인 것이다. 이 책은 중국의 고전인 『시경』과 초사를 다루고 있지만, 동양 문화에서 노래와 시가 갖는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민족은 절망할망정 결코 주저앉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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