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固有一死, 惑重于泰山, 惑輕于鴻毛, 用之所趨異也.
인고유일사, 혹중우태산, 혹경우홍모, 용지소추이야.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습니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보임안서〉
* 사마천은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궁형을 자청하고 살아남아 《사기》를 완성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생사가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으로 남기 위해서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 곧 어떻게 살 것인가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인식한 것이다.
사마천은 죽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떤 죽음에 처하느냐가 어렵다고 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대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목숨을 바쳐야 뜻있는 죽음이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생사관은 사마천의 처절한 경험에서 비롯되었고, 나아가 이를 자신처럼 역경을 딛고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다양한 인물들의 사례들에 생생하게 투영시켜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준다.
---「1부 보임안서報任安書」중에서
此三者, 皆人傑也, 吾能用之. 此吾所以取天下也.
차삼자, 개인걸야, 오능용지, 차오소이취천하야.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이고, 내가 이들을 쓸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 권8 〈고조본기〉
* 유방은 항우를 물리치고 난 다음 공신들에게 자신의 성공과 항우의 실패를 분석하게 했다. 그리고 소하蕭何, 장량張良, 한신韓信 세 사람의 공을 거론하며 자신은 이들 세 사람만 못하지만, 위 대목을 언급하며 이 세 사람을 기용했기 때문에 천하를 얻었다고 분석했다. 이 대목은 《사기》 전편을 통해 아주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데, 간결하게 유방의 ‘삼불여三不如’라 한다. ‘세 사람만 못하다’는 뜻인데, 인재의 중요성을 가장 잘 나타낸 단어다.
최근 중국 인재학에서 나온 슬로건 중 ‘인재는 데려다 쓰는 존재가 아니라 모셔와 그의 말을 따라야 하는 존재다’라는 것이 있다. 리더가 모든 면에서 뛰어날 수 없다. 인재를 제대로 보고 정중하게 모셔와서 인재의 제안과 충고에 따를 줄 아는 리더가 성공할 수 있다. 지금은 더 그렇다.
---「2부 본기本紀」중에서
然我一沐三捉? 一飯三吐哺, 起以待士, 猶恐失天下之賢人.
연아일목삼착발, 일반삼토포, 기이대사, 유공실천하지현인.
한 번 목욕하다 머리카락을 세 번 움켜쥐고, 한 번 밥을 먹다 세 번 뱉어내면서 일어나 인재를 맞이하면서도, 천하의 유능한 인재를 잃을까 걱정했다.
- 권33 〈노주공세가〉
* 주나라 건국의 또 다른 주인공인 주공周公은 노魯나라를 봉지로 받았다. 하지만 형 무왕을 보좌해야 했기에 왕실에 남고 아들 백금伯禽을 대신 보냈다. 백금이 봉지로 떠나기 전에 주공은 아들을 불러 위와 같이 말하며 교만하게 굴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대목에서 ‘일목삼착一沐三捉, 일반삼토一飯三吐’라는 천고에 유명한 명구가 추출되어 나왔다. 훗날 삼국시대의 영웅 조조曹操는 이 고사를 두고 “주공이 먹던 것을 세 번 토해내자,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로 돌아갔다”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사람의 마음과 인재가 천하를 얻는 열쇠임을 정확하게 인식했기에 가능한 말들이다.
성공한 리더들의 공통점은 인재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과 끊임없이 소통했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천하 정세, 곧 민심의 추이에 대한 촉을 한시도 늦추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인재를 대할 때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었다. 이를 ‘예현하사禮賢下士’라 한다. 주공이 형 무왕과, 무왕을 이은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보좌하면서 주나라 초기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인재에 대한 자세와 무관하지 않았다.
---「3부 세가世家」중에서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생아자부모, 지아자포자야.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이다.
- 권62 〈관중안영열전〉
* 춘추시대 동방의 제나라를 당시 최고 강대국으로 이끄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을 상징하는 사자성어가 다름 아닌 ‘관포지교管鮑之交’다. 당시 포숙은 환공을 설득하여 정쟁에서 패해 죽을 위기에 처한 친구 관중을 살리고 나아가 자신에게 돌아올 재상 자리마저 관중에게 양보했다. 한 나라의 정치를 맡아 백성을 위해 좋은 정책을 실행하는 면에서는 관중이 자신보다 낫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관중은 훗날 이런 포숙을 두고 위의 말로 포숙의 위대함을 칭송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양보가 한 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사마천은 포숙의 고귀한 팔로십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위 관중의 입을 빌려 포숙을 드러냈고, 또 “세상 사람들은 관중보다 포숙을 더 칭찬했다”는 세간의 평가를 덧붙여두었다. 실제로 제나라를 이끈 관중을 위한 전기는 마련했지만 포숙에게는 별도의 전기를 마련하지 못한 사마천은 이렇게라도 포숙의 존엄함을 드러내려 했다.
---「4부 열전列傳」중에서
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태산불양토양, 고능성기대; 하해불택세류, 고능취기심.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기에 그렇게 크고 높은 것이며, 강과 바다는 자잘한 물줄기를 가리지 않기에 그렇게 깊은 것입니다.
- 권87 〈이사열전〉
* 진시황秦始皇은 한韓나라에서 보낸 수리 전문가 정국鄭國이 첩자로 밝혀지자 외국 출신의 객경客卿들을 모두 추방하라는 ‘축객령’을 내렸다. 이에 초나라 출신의 이사李斯는 〈간축객서諫逐客書〉라는 글을 올려 진나라가 지금 이렇게 부강해진 데는 외국 출신의 인재들을 가리지 않고 기용했기 때문이라면서 위의 명언을 남겼다. 강대한 진나라를 태산과 하해에 비유한 이사의 문장에 감동한 진시황은 축객령을 취소했다.
진나라는 기원전 7세기 목공穆公 때부터 개방적인 인재정책을 통해 국력을 확대했고, 그 결과 천하를 통일하는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당시 목공은 신분, 국적, 민족, 연령을 따지지 않는 이른바 ‘사불문四不問’ 정책으로 많은 인재를 확보하여 중원 진출에 성공했다. 이사는 이 명언과 함께 목공 때의 인재정책을 거론했고, 진시황은 여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4부 열전列傳」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