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런 진풍경 뒤에는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숨어 있었다. 그 문제는 다름 아니라, 이 거대한 수족관의 유리가 그 속에서 유유히 떠다니며 잔치를 벌이는 신기한 바다 생물들을 바깥 세상으로부터 언제까지 보호해 줄 것인지, 지금은 구경꾼들이 어둠에 묻혀서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고만 있지만 이들이 언제 수족관을 덮쳐서 그 안의 물고기들을 잡아먹을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둠에 묻힌 채 넋을 놓고 구경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마도 '인간 어류학'에 능통한 문필가도 끼어 있을 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그는 음식물을 삼키는 여느 늙은 암컷 물고기의 주둥이를 관찰하면서 이를 종에 따라 혹은 선천적 성질에 따라 분류하고픈 욕망을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후천적 성질에 따라 분류할지도 모르는데, 이 여자는 바다 물고기 주둥이를 하긴 했지만 라로슈푸코 집안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포부르 생 제르맹이란 민물에서 성장한 물고기란 사실을 간파할 것이기 때문이다.
--- pp. 20~21 (2권 중에서)
저녁이면 불을 환히 밝힌 호텔 식당으로부터 사방으로 빛이 퍼져 나갔다. 그때 호텔 식당은 하나의 거대한 수족관으로 변모하는 동시에 바깥의 어둠에 파묻힌 채 발벡 공장 노동자며 어부며 근처에 사는 서민들의 무리가 앞다투어 수족관 유리에 얼굴을 부벼대며 호텔 내부를 구경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감미로운 황금 물결 위로 부유하는 호텔 손님들의 호사스러운 몸짓은 가난한 그들에게는 마치 신기한 물고기나 연체동물을 보는 듯이 별천지를 연출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 기쁨은 파티가 끝나고 내가 호텔로 돌아와 비로소 나 혼자가 되었을 때 제대로 음미할 수 있었다. 그 기쁨은 사진술에서 느끼는 기쁨과도 같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대면하고 있을 때는 그저 '찰칵'하고 네거티브 필름만 찍은 셈이어서 나중에 숙소에 돌아와서야 현상을 할 수 있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닫혀져 있는 내 안의 암실에 홀로 들어앉아 있을 때라야 비로소 차분히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교계 모임 중에 우리의 이름이 주인의 입을 통해 소리 높이 고해지는 순간, 그것도 엘스티르와 같은 인물에 의해서 이름이 고해질 때, 마치 동화 속 요정이 대번에 사람을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것과도 같은 이 엄숙한 순간에, 우리가 그토록 곁에 있고 싶어하던 사람은 일시에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법이다.
아가씨에게 접근을 해서 궁금했던 것들을 점차로 알아 가는 동안, 아가씨에 대한 인식은 마치 뺄셈처럼 이루어졌다. 내가 가장 먼저 수정해야 했던 것은 그녀의 이름과 가족상황에 관한 것이었다. 다음으론 사근사근해 보이는 아가씨의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마침내 나는 이 아가씨가 말할 때마다 '아주'란 단어 대신 '완전히' 란 부사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랐다.
"그 여잔 완전히 미쳤어요. 하지만 마음은 아주 착한걸요"
'완전히'란 말이 귀에거슬리기는 했지만, 이 말은 자전거 선수 차림에 골프에 미쳐 있을 정도로 끼가 있고 톡톡 튀는 여자라고 여겼던...
"그 사람은 완전히 진부하고 완전히 따분한 사람이예요..."
이 아가씨가 어느 정도의 지식과 교양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나는 알베르틴과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의 눈 밑에 있는 점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순간, 그날 저녁 마침내 그녀가 엘스티르 씨 댁을 떠나는 무렵 그녀의 턱 위에서 점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중에 알베르틴을 다시 만날 때마다, 그녀가 얼굴에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하지 않은 나의 기억 때문에 언제나 점의 위치가 달라 보였다.
--- p.23
도대체 이 극도의 희열감은 어디서 온단 말인가? 나는 이 희열감이 홍차와 과자 때문에 생겨나긴 했지만, 단순한 감각의 차원을 뛰어넘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은 과자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홍차에 적신 과자가 뭔가를 일깨운 것이다... 그후, 연거푸 열 번은 더 마셔 봐야 했는데...
지금 내 안에는 과자 때문에 되살아난 이미지, 시각적 기억이, 이 맛의 뒤를 따라 내 자아에까지 이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머나먼 과거의 기억이 과연 내 의식의 표면에까지 이를 수 있을지...
갑자기 내 눈 앞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레오니 이모)
이 맛, 이 맛은 바로 콩브레에서의 일요일 아침, 레오니 이모께서 홍차나 티욀차에 적셔 주시곤 하던 마들렌느 과자의 맛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레오니 이모"
물이 담긴 사기 그릇에 형체 없는 종이 조각들을 넢자마자 종이가 퍼지고 윤곽이 생기고, 색깔이 나타나고, 또 제각기 서로 다른 모양이 만들어져 꽃이 되고, 집이 되고, 우리가 잘 아는 사람 모습이 되는 일본 놀이에서처럼, 이모네 정원에 핀 꽃, 스완 씨네 넓은 뜰의 온갖 꽃들, 또 비본느 강의 연꽃은 물론, 순박한 마을 사람들, 작은 집들, 그리고 마을 성당, 나아가 콩브레 전체와 그 근방, 이 모든 것, 마을과 정원들이 모두 내 홍차 잔으로부터 고스란히 살아서 나왔다.
--- pp. 15~17
나는 할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결국 제방에서 멀리 떨어진 발벡 신시가지에 있는 엘스티르 씨의 아틀리에를 마지못해 찾아나섰다.
엘스티르씨가 살고 있는 집은 외양이 꽤나 흉칙한 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집을 택해 사는 까닭은, 이 집이 발벡에서 그가 아틀리에로 쓰기에 충분한 공간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집이기 때문이었다.
엘스티르씨의 아틀리에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일종의 실험실처럼 보였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의 아틀리에에 있는 그림들은 거의 대부분 그가 발벡에서 그린 바다 풍경화들이었다. 나는 그 그림들을 보면서, 그의 그림이 간직하고 있는 매력이, 이를테면 시에서 은유라고 부르는 기법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변모시키는 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그림에서 가장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이 변모의 기법은, 육지와 바다를 함께 그리면서도 이 둘 사이의 경계를 없애 버리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예컨대 이런 종류의 은유는 엘스티르가 불과 그 며칠 전 완성한 캬르크튀이 항구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데, 화가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마을은 바다의 요소를 빌려 표현하고, 반대로 바다는 뭍의 도회지적 요소를 빌려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항구를 그린 그림이긴 하지만, 이 그림은 바다가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있고, 육지는 바다의 속성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물과 뭍 모두에 사는 양서류처럼 그려지고, 사방에 바다의 활력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 p. 14 (3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