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일 전에 미국의 베스트셀러 리스트 1위에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의 『 Mrs. Dalloway 댈러웨이 부인 』이 오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물론, 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될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고 1925년에 쓰인 고전이 갑자기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 Mrs. Dalloway 댈러웨이 부인 』이 돌연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은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 소설 『 Mrs. Dalloway 댈러웨이 부인 』이 주인공인 『 The Hours 디 아워스 』소설과 그것을 각색한 영화의 인기 때문이었다.
어떤 영화이길래 그토록 큰 반향을 일으켰는가 싶어서 관람을 했는데, 보고 나서 매우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여기서 『 The Hours 디 아워스 』를 조목조목 비판할 수는 없으나, 한 비범한 작가를 너무 평범한 여자로 만들어버렸고, 너무 특별한 한 결혼을 상당히 범속한 결혼으로 만들어버렸고, 거기 나오는 모든 등장 인물들은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인물들이었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일생을 정신 이상의 그늘에서 아슬아슬한 삶을 살았지만, 그녀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 Mrs. Dalloway 댈러웨이 부인 』의 주인공 클래리싸 댈러웨이 Clarissa Dalloway는 정신 이상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크고 작은 상처를 지니고 살지만, 그러나 꽃을 사러 아침에 도시를 거니는 것에서부터 자기집 하녀에게 사랑받는 것 같은 사소하고 평범한 일에 신선한 행복을 느끼는 ‘정상적인’ 여성이다. 지적 능력에서나 영적인 깊이에서나 도덕적인 투철함에 있어서나 특출한 점이 전혀 없는, 조금 세속적인 갱년기 여성이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그녀가 모든 여성의 감각과 고뇌와 꿈과 슬픔을 지닌 ‘every woman’임을 알게 된다.
52세에도 아직 가뿐한 걸음걸이와 소녀다운 분위기를 지닌 클래리싸는 그 날 저녁에 파티를 열기로 했기 때문에 장식용 꽃을 사러 런던의 번화가를 지난다. 이른 아침의 거리 풍경은 그녀에게 신선하게 다가오고, 그녀는 거물이 탄 승용차의 타이어가 펑크나는 일 따위에도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외부적인 모든 자극과 인상은 그녀에게 과거, 특히 열아홉살의 여름에 친정집에서 일어난 일--그녀로 하여금 사랑하면서도 결별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첫 애인 Peter Walsh의 행동과 말들, 그리고 현재의 남편 리처드 댈러웨이 Richard Dalloway와의 첫 만남에 얽힌 일--들을 연상시킨다. 피터 월쉬와 헤어진 상실감은 아직도 그녀의 마음에 큰 공허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녀는 그와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 헤어진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면서 스스로에게 확인시켜야 한다. 딸이 노처녀 가정교사와 너무 밀착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녀에게 소외감을 주고, 큰 병치레를 하고 난 후에 남편과 각방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그녀에게 고독감을 더해준다. 20세기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기법인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의 전범(典範)으로 꼽히는 이 소설은 여주인공의 52세의 편재와 33년 전의 과거가 거의 동일선상에 배열되며 부단히 교차한다.
작품 속에서 그녀와 한 번도 해후하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어두운 더블 (dark double)의 역할을 하는 퇴역군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 Septimus Warren Smith는 1차 대전에 참전하고 난 상흔으로 아무런 느낌이나 감각이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젊은 이탈리아인 아내인 루크레지아 Lucrezia의 애타는 호소에도 그녀에게 애정을 보여주지 못함은 물론, 어떠한 세상사에도 관심을 갖지 못한다.
꽃을 사갖고 집으로 돌아 온 클래리싸는 국회의원인 남편이 어느 정치성향이 강한 귀족부인의 오찬에 초대를 받아 간 것을 알고 소외감을 느끼며, 인도에서 오래 주둔하다가 젊은 여자와 결혼수속을 밟기 위해 찾아 온 옛 애인 피터.월쉬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다시 애정과 환멸을 느끼며 그의 무언의 비판에 상처를 받는다. 오찬 자리에서 아내의 옛 애인 피터가 영국에 왔다는 말을 들은 클래리싸의 남편 리처드는 갑자기 아내와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장미꽃을 사 들고 집으로 들어온다. 사랑을 고백하리라고 마음 먹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클래리싸는 남편의 마음을 충분히 안다.
전쟁후유증환자 셉티머스는 주치의의 권유로 정신과전문의의 진찰을 받으러 갔다가, 거만하고 비인간적인 전문의를 만나면서 인간에 대해 더욱 염증을 느끼고, 정신병자요양원에 강제 격리수용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한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섭섭함과 비애만을 느끼던 그의 어린 아내는 마지막에 그를 이해하고 그의 자살을 배반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뛰어난 감각을 지녔기 때문에 손님 접대에 능한 클래리싸의 파티는 대 성황을 이룬다. 남편의 출세를 돕기 위해서 사교적인 모임을 마련한 것이지만 클래리싸 자신도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 그들의 자아(自我)를 잠시 누그러뜨리고 순간적으로나마 화합의 분위기에 젖는 파티를, 그리고 그 화합이 일어나게 하는 것을 즐긴다. 파티에 늦게 도착한 정신과전문의가 어떤 정신이상 청년의 자살 때문에 늦었다는 말을 듣고 그 청년의 자살에서 어떤 해방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고 억매어 사는 이 생을 훌훌 떨치고 간 청년 . . . 클래리싸가 그 청년과 일체감을 느끼면서 이 소설의 두 줄기가 합치게 된다.
버지니아.울프는 너무도 섬세하고 예리한 감각 때문에 희열도 예리하게 느꼈겠지만 남다른 고통이 너무나 많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클래리싸는 지성이나 문학적 소양에서 울프를 닮았다고 할 수 없고 그녀의 극도로 예리한 감수성도 지니지 않았으나,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데에는 어떤 평범한 여성에게도 강인함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큰 사건의 도움 없이 한 여성의 일상적인 하루를 통해 신선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은 전혀 병적이지 않고, 가벼운 장난기가 섞인 아름다운 산문시와 같은 문체 속에 평범한 인생의 아픔과 의미와 허무와 환희를 담은 잔잔하면서도 위대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