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가는 근사한 삶을 살고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한 번 잘해보라고 진심으로 응원해 줄 준비가 돼있어. 진짜야. 하지만, 왜 그들은 나에게 응원해 주지 않는 걸까.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게 없는 삶이라도 갑자기 죽거나 하지는 말고 그냥 지금 이대로 한 번 잘 살아보라고 말이야.”
“......”
“......”
“한 번 잘 살아봐. 갑자기 죽거나 하진 말고.” --- p.15
“왜 없애? 이 비린내는 죄가 아니야. 오히려 서로의 비린내를 흉금을 터놓고 들이마실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어. 어디서나 맡을 수 있는 흔해 빠진 향수 냄새 대신 말이야.” --- p.19
“너한테 잘 보이려고 안 그런 척 해서 그렇지 사실은 질투도 많고 짜증도 잘 내. 괴팍하고 성급하고 겁도 많고, 또 그리고 인내심도 부족해서 뭐든 금방 싫증내고 포기도 빠르지. 의외로 아주 상스러운 구석도 있고 말이야. 잘난 척도 곧잘 하지만 다 허세고 사실 속으로는 앞날이 불안해 죽겠어. 그런데도 날 좋아할 수 있어?”
“뭘 그렇게 복잡하게 얘기해? 쉽게 말해 평범하다는 얘기 아냐? 뭔 상관이람?” --- p.25
사실 인간은 쓸데없는 짓을 할 때 가장 인간적이다. 쓸데없음을 넘어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탐닉하기에 동물 일반과 다른 존재이기도 하다. 백해무익이라고는 하나, 효율성으로만 따지자면 자연을 넘어설 수 없다.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순리대로 움직이는 자연이야말로 지극한 효율성의 경지를 보여주는데 인간은 그런 자연을 닮고 싶어할 수는 있어도 죽어 흙이 되지 않는 이상 자연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살아 있는 인간은 비효율적이고 쓸데없는 짓을 하기 때문에 인간이며 나아가 그중 어떤 인간들은 사랑이나 예술 같은 쓸모없이 뜨겁고 위험한 것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도 하며, 역사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만 골라 기록해 놓은 것 같은 착각조차 일으키게 할 정도다. 젊은 날 어느 정도의 치기나 어리석음은 삶 전체를 오히려 풍요롭게 하듯,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일들이 훨씬 많다. --- p.45
우리 사회의 수많은 미생이 바야흐로 무럭무럭 자라야할 이 따사로운 봄날에, 여전히 수많은 이웃이 굴뚝 위나 차가운 바다 속에서 영원할 것만 같은 추위 속 설국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봄날이 가고 우리들의 사랑도, 희망도, 한때의 그 실없는 기약도 언젠가는 아련한 옛일이 되어버릴 게 분명할지라도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했던 그 마음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 p.49
문화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변화를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그 변화 속에서 제 삶의 근거를 잃지 않기 위해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나아가 기록하는 사람들이다. --- p.58
술을 꽤 좋아한다. 좋아하다보니 술하고도 닮아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소주를 마시고 취하면 고구마 비슷해지는 것이다. 데킬라 같은 경우엔 그 원료인 악어용설란이 에로틱한 동물의 혀처럼 생겼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조금쯤은 야해질 수밖에 없다. --- p.71
애무(愛撫). 이 세계를 사랑하는 가장 근사한 방법,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없는 것을 어루만지는’ 용기. --- p.73
쿨 cool 과 핫 hot 사이에 웜 warm 이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 다정이 있다. --- p.84
모두가 한 입으로 경제, 경제만을 외치는 이 ‘동상(同床)’에, 더 많은 ‘이몽(異夢)’이 필요해 보이는 까닭이다. ‘만장일치는 무효’라던 탈무드의 금언처럼,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저마다 다른 삶을 꿈꾸고 살아갈 권리가 있다. 강자의 입장에서야 획일화한 기준으로 서열을 매기고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게 편리한 일이겠으나, 약자의 입장에서는 한 시도 쉬지 않는 동상이몽이야말로 이 병든 이데올로기로부터 호명 당하지 않고 제 삶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상동몽’, 서로 다른 곳에 있지만 같은 꿈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만나고 함께 하는 것 역시 긴요한 일이 되었다. 우리가 모두 제대로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열린사회를 위해 말이다. --- p.102
일상이 고달플수록 스펙터클에 마음을 빼앗기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따지고 보면 다 남의 얘기들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일상성의 회복’에 있다. 일상성은 완강하고도 보수적이지만 바로 그 속에서 싹트는 창의성과 상상력이야말로 건강하고도 구체적인 쾌락이며 기쁨이다. --- p.122
축제를 망치는 가장 확실하고도 빠른 방법은 무엇인가. 나누고 쪼개는 것이다. 효율성의 논리가 필요한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잘 판단하지 못하면 긁어 부스럼일 뿐이다. 사람들이 세속의 일상에서 벗어나 만나고 싶은 것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이지 과시와 안락함이 아니다. 조금 불편해도 괜찮다. 외롭고 삭막한 삶이 무서운 것인데 왜 자꾸 더 쪼개고 떼어놓으려는 것일까. --- p.140
고독감이라고나 할, 이제는 사라져버린 어떤 우아한 기품이 그리워진다. 많다는 사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오직 하나로부터만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감동이란 게 어딘가에는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진다. 꼰대가 되어 조목조목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진다. 어찌할 바 없이 비로소 중년의 남자가 되어버렸다고 해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빼도 박도 못하니 비틀기라도 해보는 수밖에. --- p.176
에드워드 호퍼의 ‘아침 해’같은 작품이 걸려있고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가 흐르는 도서관에서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다 실제 아침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사위는 고요하지만, 가슴은 얼마나 뜨거워질 것인가. --- p.203
하루를 잘 살아간다는 것.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풍경을 소중하게 바라본다는 것. 곁에 있는 사람을 꼬옥 꼬옥 안아주는 것. 거기서부터 희망은 시작되는 것일 테지. --- p.219
다시 봄이 올 때까지, 광안리는 그들에게 하나의 경계가 될 것이다.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회색 몸뚱이에 순백색 대가리를 가진 저 갈매기가 어느 날 문득 작심하고 날개를 펴 순식간에 세 배 정도 커진 몸으로 저 멀리 수평선을 넘어 날아갈 때까지, 바다를 닮은 푸른빛을 띤 노란색 부리로 더 이상 아이들이 던져주는 새우깡 따위를 받아먹으려하기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잠시 침묵하는 날까지. --- p.221
2015년에 마흔 살이 됐다. 그동안 무턱대고 살아왔다. 또,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만큼이나마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희한한 장점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덕분에 이런저런 영역에서 다양하고 재미있는 일도 많이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읽고 쓰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든, 그 바탕에는 읽고 쓰는 일이 있다고 지금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든까지 산다고 내 맘대로 가정해보면, 마흔이 된 나는 이제 생의 반환점을 돈 셈이다. 지금까지의 40년을 시즌 원이라고 한다면 시즌 투를 준비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뭔가 자축(?)의 의미로 기념이 될 만한 걸 남기고 싶었다.
--- p.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