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맞아 살아 있는 가족 친척이 함께 믿음 안에서 유대를 강화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조상의 신앙과 얼을 기리고 계승한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데가 있습니다. 전혀 믿지 않던 조상을 둔 자녀들의 경우입니다. 조상으로부터 받은 신앙의 유산이 없는데, 대체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뜻을 기리고 무슨 얼을 이어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이 땅에 카톨릭이 전파된 지는 200년, 개신교 역사는 겨우 100년 밖에 안됩니다 .그 이전의 우리 조상들은 모두 예수의 '예'자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주님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조상의 자손으로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추석을 맞아 조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 함께 베드로전사 3장 18절에서 20절을 찾아보겠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18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대속물로 바쳤음을 의미합니다.
-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18하)
본문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기까지 사흘 동안에 있었던 일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 때 죽임을 당하셔던 주님께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몸의 부활이요, 그 부활은 사흘 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이 있기 전 사흘 동안 주님의 몸은 죽으셨지만 영은 살아계셨다는 것이 본문의 증언입니다. 그렇다면 사흘 동안 주님의 영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 저가 또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19)
그 사흘 동안 주님의 영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습니다. 전파란 복음을 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옥에 있는 영들이란 누구입니까?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20)
바로 노아의 홍수로 심판받은 자, 이미 죽은 자의 영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육체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계서는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자를 위해 일하셨고, 사흘 동안 당신의 육체가 죽임을 당하셨을 동안에 영으로 이미 죽어서 이 땅을 떠난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후 400년부터 이 사실을 사도신경을 통해 신앙고백 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찬송가 겉장을 열어 보십시다. 한쪽에는 주기도문, 또 한쪽에는 사도신경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찬송가에 따라서는 사도신경의 영문 번역도 병기되어 있습니다. 한글과 영문 사도신경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한글판에는 없는 구절이 영문에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He descended into hell." (주님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왜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없는 이 구절이 영문엔 들어 있는 것입니까?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사도신경 원문에 이 구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은 매 주일 사도신경을 통하여 이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잇습니다.
"십자가가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었으며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 온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알고 믿고 고백하고 있는 이 사실을 유독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만 모르고 있으니, 어찌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이 진정 깨어있는, 열린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 우리 조상들은 저주 받고 지옥에 갔느냐는 질문에 대하여도, 개신교 신자만은 유구무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 죽은 영들에게도 복음 전하셨음을 알고 믿었던 초대 교회는, 그러므로 살아 생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은 자들의 영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부탁드리기를 주저치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9절을 찾아보십시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무엇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절대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습니까? (표준새번역)
(...) 이것이 저 혼자만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91년 8월 7일자 '새누리신문'에는, '죽은 자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이에 대한 협성신학대학 안석모 교수의 답변이 게재 되어 있습니다. 협성신학대학은 감리교단에 소속된 신학교로서 소위 이단이 아닌, 정통신학교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질문> 얼마 전에 병으로 앓던 여동생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는 했지만 신앙심이 깊지는 못하였습니다. 자꾸만 그 동생의 구원 문제에 대해 불안해집니다. 동생의 구원을 위해 기도를 해도 괜찮은지요?
<답변> 이미 죽은 이를 위한 구원 문제에 살아 있는 이의 공덕이나 선행 혹은 신심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라는, 매우 미묘한 신학적 함축성을 담고 있는 질문입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가톨릭 신앙은 죽은 이를 위한 기도나 미사를 드리는 전통이 있고, 또한 그 효능에 대해 교리적으로 확고히 선 입장이 내려오고 있스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에는 이 문제에 대해 침묵 내지는 묵시적 반대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소극적 태도는 루터의 종교개혁 시대로까지 소급됩니다. 루터 당시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재정 부족을 충당하기 위해 소위 면죄부라는 것을 팔면서, , "여러분이 헌금 바구니에 떨구는 은전 소리에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으로 성큼 올라섭니다"하는 식의 설명을 하였다 전해집니다.
바로 이 면죄부는 살아 있는 이가 죽은 이의 영혼의 보속을 위해 사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이를 위해 살아 있는 이가 기도, 헌금, 선행, 미사 등을 통해 그 구원의 여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루터는 이에 대해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가르침으로 반대 의사를 분명희 표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를 위해 살아 있는 이가 무엇인가 행하는 관습은 유대인 전통에도 있었고, 초대 교회에서도 유사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읽어 보면,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이를 위해 나중에 누군가가 대신 세계를 받음으로 죽은 이의 구원을 위해 진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관습에 대해 바울은 옳다 그르다 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이론을 위해 예증으로 이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물론 이런 관습 등으로 가톨릭 교회의 연미사, 죽은 이를 위한 기도 등의 전통이 생겨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 신자들은 죽은 이를 위해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선 교리적 효능을 떠나 돌아가신 분을위해 기도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 영혼의 평안과 명복을 비는 것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 기도나 (그를 기념하는) 선해이 신앙적인 효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교회 지도자와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견해나 결정이 나온다고 해도, 망자를 위한 살아 있는 이의 효심이나 기리는 마음, 또 살아 있는 이를 위한 정서적 안녕을 생각하는 쪽에서 논의가 이뤄져야 하겠습니다. 제 자신은 교리상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목회양호(牧會養護)의 문제로서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권장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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