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이변이 없는 한 한동네, 한집에서 오래 살았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및 중·고등학교까지 만났던 친구들의 배경이 대개 비슷했다. 형제가 여럿인 경우에는 형제들 모두가 동창인 경우도 있어서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할 때, 같은 집을 방문하는 예가 빈번했다. 가장 오래된 교동이나 재동·수송·덕수 아니면 장충 초등학교 등을 나왔거나 서울사대부속 초등학교·서울교대부속 초등학교 또는 1960년대 중반 신설된 사립학교 등을 나온 친구들의 문화는 거의 같다. 그때는 명문 공립중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지금의 광화문 일대 한옥 문간방으로 위장전입을 해서 덕수초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만일 명문중학교 입시에 실패한 경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립초등학교 6학년으로 편입해 재수를 하며 다시 중학교 입시를 준비할 정도였다.
---조인숙(건축가) 씨의 에세이 ‘나누며 더불어 살던 사람들’ 중에서
100년 사이의 급격한 인구 이동은 서울 주민의 자의식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문제를 초래하였다. 파리와 뉴욕의 경우 그곳 주민들은 ‘파리지앵’과 ‘뉴요커’라는 고유명사를 통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과거에 살았던 한양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서울내기’란 말에서 볼 수 있듯 과거 한양 사람은 자신만의 독특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국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서울과 그 주변에 모여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과연 그러할까? 오늘날 서울 주민 가운데 자신을 ‘서울내기’라고 생각하는 사람 즉, 서울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서울시에 지방세를 납부하고 있는 사람들 대다수는 결코 자신을 ‘서울내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 거주하고 있고 앞으로도 결코 떠날 생각이 없는 서울에 대한 귀속감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이미 떠나왔고 앞으로도 돌아갈 생각이 없는 출신지에 대한 귀속감을 더 강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서울은 어쩌면 ‘서울에 사는 사람’은 있어도 ‘서울사람’은 없는 도시일지도 모른다.
---정숭교(한국사학자) 씨의 소론 ‘서울사람의 출현 그리고 그들의 자의식’ 중에서
서울은 조선 왕조의 500년 도읍지가 되기 전에도 우리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한 국가의 중심이 되어 오랜 세월 축적한 정신문화는 서울을 서울답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물론 정신문화를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유물도 중요하다. 하지만 한 가문의 종가에서도 수백 년 이어 온 전통이 느껴지는데, 하물며 한 민족의 종가인 서울에서 느껴지는 정신적 깊이와 기품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늘 그 자리를 지켜 온 종가가 전국을 떠도는 그 집안 후손들의 구심점이 되는 것처럼, 서울사람들에게는 서울이란 종가가 있기에 지구 곳곳을 떠돌아도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돌아갈 정신적 고향이 있으므로.
---김녕만(사진가) 씨의 에세이 ‘흔들리고 좌초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들’ 중에서
(6·25 한국전쟁 직후) 그렇게 어려웠던 시절에도 서울 토박이들은 남에게 신세 지기를 싫어했다. 그와 관련된 우스갯소리도 있다. 1903년 종로구 광화문 시내에 기생요리옥 ‘명월관’이라는 유명한 요릿집이 생겼는데, 돈이 없는 서울사람들은 그 요릿집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 뒷골목에 있는 호떡집에서 호떡 하나 사 먹고 나오면서 명월관 앞으로 가 거기서 이를 쑤신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허세가 아니라 자존심이었다. 가진 건 없어도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 전부터 수도 서울에 뿌리를 두고 대대로 살아 왔던 서울 토박이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염치없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서울 토박이들이었다. 도가 지나칠 경우에는 그런 점이 오만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서울 토박이회 고희구 회장, 김영성 부회장, 강연선 부회장과의 인터뷰 중에서
서울의 생태문화적 전환을 위해 무엇보다 원래의 서울에 주목해야 한다. 서울은 크게 도심과 외부로 나뉜다. 도심은 바로 원래의 서울인 도성 안을 가리킨다. 원래의 서울은 약 18km 길이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성곽 도시였다. 성곽은 주산(主山)인 백악, 좌청룡인 타락, 우백호인 인왕, 안산인 목멱 등 ‘내사산(內四山, 안쪽의 네 산)에 기대서 건설되었다. 전체 면적은 16㎢로, 현재 서울의 37분의 1 정도의 크기이다. 그러나 이 작은 곳이야말로 5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조선의 왕도(王都)였던 귀중한 곳이다. 이곳이 무참히 파괴되고 개발되어 버린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도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홍성태(사회학자) 씨의 소론 ‘생태문화적 전환과 서울의 희망’ 중에서
명절 때가 되면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잖아요. 서울 토박이들은 여기가 고향이니까 갈 곳이 없어요. 서울을 지키고 있다는 긍지가 있지요. 토박이이건 아니건 간에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자기 소신껏 살아가는 모습에 긍지를 느끼면 되는 것이지요. 관에서 고궁 등을 개발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서울의 자긍심을 높일 수 없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곳, 생활의 때가 묻어 있는 곳곳의 풍경을 이어 나가는 것이 자긍심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진행된 재개발로 그런 풍경들이 없어지고 나니까 결국 남는 것은 빌딩과 아스팔트와 시멘트입니다. 예전에는 마포에 가면 새우젓이 있고, 뚝섬에 가면 뭐가 있고 하는 것이 있었고, 이것이 서울 옛 문화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부분이 전부 다 재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나마 옛 문화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는 분야는 음식 쪽일 것입니다. 당시에도 유명했던 명동 ‘하동관’, 청계천8가 ‘대중옥’ 등은 지금도 남아 있지요. 그리고 추어탕은 어떻게 끓이고 어느 집(식당)에 가서는 무엇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남아 있으니, 문화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문화와 함께 살려야 하는 것은 놀이문화죠.
---(서울 토박이 중앙회 권오철 사무국장) 방담 ‘겻불도 안 쬐는 서울깍쟁이, 이웃과 더불어 살았다’ 중에서
‘서울성(性)’, ‘서울인상(象)’을 정립하기 위한 근간은 전통문화가 되어야 한다. 그 전통문화는 고궁의 기와에 매달려 있는 죽은 문화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며 즐겼던 생활 속 전통문화여야 한다. 농경사회 서울에서는 집집마다의 마당에서 벌어졌던 마을 공동체 문화였으며, 그 마을에서 농사가 사라진 뒤에는 골목에서 친구를 만나 정을 나누었던 골목 문화다. 함께 화투를 치던 마을 아낙들이 그 이튿날 밭에서 함께 일했던 것과 같이 놀이와 일이 융화된 생활 공동체의 정신을 살려야 할 것이다. 그 위에 피어나는 개인성은 보다 성숙한 서울 시민의 상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기대한다.
---방담 ‘겻불도 안 쬐는 서울깍쟁이, 이웃과 더불어 살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