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은 거짓과 함께 시작된다. 그는 출생년도를 1867년에서 1869년으로 바꾸었다. 악의는 없는 하얀 거짓말이었다. … 나이를 2년 줄임으로써 1890년대에 시카고에서 매우 젊은 나이에 일찍 성공을 거둔 유망한 건축가가 되었다. 또한 1950년대 인생의 말년에 눈부신 활약을 펼치던 시기에 와서는 자신의 나이가 90대란 것을 늘 꺼림칙하게 생각했는데 92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1959년 4월에 숨을 거두면서 90세가 되기 직전에 사망함 셈이 되었다.---1장 라이트 스스로 재구성한 어린 시절p. 20
오점과 실패는 라이트 전설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오점과 실패로 인해서 영웅이나 예술가 또한 우리와 같이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만족감을 갖는 법이다. 진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라이트의 빌딩에 비가 샌다는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양동이 하나인 집, 양동이 둘인 집, 양동이 셋인 집 들이 있다. 그 숫자는 필요에 따라 증가한다. … 물이 책상 위로 샌다는 불평을 하는 고객에게 라이트가 대답한 말 가운데 유명한 것이 있다. "책상을 옮기시오." 다른 한 고객이 흘러내리는 물을 받기 위해 양동이와 냄비 등을 여기저기 놓자 그의 아내가 말했다. "예술작품(집)을 빗속에 방치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4장 제도사에서 건축가로, 위대한 이행, p. 85~86
제국호텔의 명성은 대체로 일본 역사상 최악의 지진이라고 불리는 1923년 9월 1일의 관동대지진을 이겨냈다는 사실에 있다. 그때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대부분의 도쿄 건물이 파괴되었다. … 통신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기 때문에, 며칠이 지나서야 라이트는 유명한 문구가 들어간 전보를 받았다. "호텔은 귀하의 천재성의 기념비처럼 피해를 당하지 않고 우뚝 서 있음." 전보의 서명은 오쿠라 남작의 것이었다. … 호텔이 살아남은 이유는 그가 자랑하던 플로팅기초공법, 다시 말해 기초가 충격에 부서지는 대신 바로 밑에 있는 부드러운 진흙과 함께 움직이게끔 만든 공법에 있었다. 더불어 라이트가 디자인 겸 화재안전설비로서 연못을 설치하자고 주장했던 것에도 있었다. 그로 인해 호텔은 지진과 함께 뒤따른 맹렬한 화재를 견딜 수 있었다. 수백 명의 집 잃은 사람들이 그 호텔로 대피했다.
---7장 미리암 노엘의 등장과 제국호텔 건축,p. 178~179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도면을 애타게 기다리던 카우프만이 곧 방문한다는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고서 급박해진 라이트는 낙수장을 거의 즉석에서 설계했다고 한다. 라이트는 펜실베이니아 현장을 몇 달 전 두 번 방문하고 지형도를 요청해서 받았지만 아무것도 그려놓지 않았다. … 라이트는 제도 탁자에 앉아 그 집의 설계도를 그리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고 한다. 집이 어떻게 위치해야 하며,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어떻게 사용될 것이고, 주인집 가족들이 어디에 앉고 물건들을 어디에 두어야 하며, 심지어 벽난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매달린 붉은색 주전자로부터 찻물 끓이는 방식까지 정확하게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등이 신속하게 준비되었고 카우프만이 도착한 바로 그 시각에 그는 의기양양하게 일을 끝냈다.----10장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전성시대, p. 247~248
그는 언제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 그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그를 경계인으로, 혹은 그가 스스로에 대하여 주장한대로 아웃사이더로 취급하는 것이다. … 전통을 무시하고, 일반적인 취향과 도덕규범을 부정하고, 20세기의 건축을 압도한 모든 운동이나 제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킴으로써 그는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자유스럽게 자기 자신이 되고, 살고, 믿고, 일했다. 그는 자신의 완고한 개인주의를 자랑스럽게 강조하고 "남과 다름"이라는 감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 그는 스스로를 최초의 "스타" 건축가로 만들었다. … 그는 시대에 맞지 않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재능 있는 몽상가에다 낡은 사상을 고수하는 낭만주의자인 그는 21세기가 아직도 흡수하고 있는 디자인, 도시계획, 구조상의 개념 등을 창출했다.
----11장 구겐하임 미술관의 탄생, p. 282~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