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의 동료들 중에는 친척과 놀이친구는 물론 선원과 다양한 국적의 용병, 조선공, 포병도 있었으며, 그 외에 다양한 신분의 러시아 가문 자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안에 따라 교양 있는 루테니아인(우크라이나인/벨로루시인) 성직자, 독일인 법학자, 기타 외국인 학자, 네덜란드나 이탈리아 혹은 프랑스인 예술가와 건축가, 한두 명의 영국인 상인, 혈통이 모호한 발트 해 지역 출신의 정부(情婦) 등이 가세했다(이 여자는 나중에 황후와 여제가 된다). 수십 명에 이르는 이 동료 집단의 구성원들은 표트르가 러시아 해군을 창설하고 육군을 근대화하며 새 수도의 기초를 닦고, 국가를 급진적으로 재조직하며, 때로 과격한 수많은 사회문화적 개혁을 추진하는 것을 도왔다. ---p. 14~15
표트르는 또한 전임 차르들이 남겨놓은, 오스만투르크와 폴란드 사이의 유동적 국경선과 긴장 관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새 영토를 얻고 전략적 안전성을 확보하려는 이 두 강대국과의 전쟁은 스웨덴과의 전쟁 때문에 불가피하게 지연되었다. 스웨덴과의 전쟁은 단순히 발트 해안의 일부 영토를 확보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유럽 북동부의 패권을 다투는 문제였다. (…) 1700년 스웨덴이 나르바에서 러시아를 패배시킨 직후 몇 년 동안, 표트르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러시아는 스웨덴의 우방국들에 의해 분할될 것처럼 보였다. 표트르는 러시아에도 유럽 선진국에서 진행되던 군사적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군의 창설은 그 과정의 중요한 단계였다. 또다른 중요한 작업은 육군의 근대화였다. ---p. 56~57
표트르는 그가 물려받은 국가를 좀 더 효율적으로 기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진정으로 동시대의 유럽에서 빌려온 것에 맞먹는 수준으로 그 권력을 법제화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진보를 이루었다. (…) 상대적으로 낙후된 러시아의 정치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유럽에서 경험한 관료제 혁명으로 러시아 정부를 인도하는 것이었다. 표트르의 개혁국가를 러시아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만큼만 동시대 유럽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표트르의 러시아는 동시대 프랑스, 프로이센, 스웨덴 등에서 부상하고 있던(혹은 이미 형성된) ‘절대군주제’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절대군주국가의 세습왕권은 모두 새롭게 근대화된 군사력과 국가관료제를 갖추어 국내 통치를 강화하고 외국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p. 95~96
표트르의 거대한 혁명 프로젝트의 각 구성 요소는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수많은 새로운 문화적 실현, 가치, 용어들을 받아들이게 했다. (…) 의복, 행동거지, 사교, 항해, 건축, 조경, 화기, 미술, 회계, 측량, 조각, 작문, 시각화의 새로운 방법이 도입되었다.
표트르 치하 러시아의 경우, 그의 체제가 추진한 경제적 혹은 사회적 변화들은 주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최종적으로 경제적 혹은 사회적 혁명으로 이어졌다. 표트르 시기에 일어난 것 중에서 러시아에서 큰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문화적 혁명이었다. 문화혁명은 동시대 러시아인의 삶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방면에서 일어난 변화들에 촉발되었지만 또한 그 변화들을 넘어선 것이기도 했다. ---p. 115~116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혁명을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체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빠른 속도로 러시아의 새로운 해군과 근대화된 육군의 가장 중요한 기지가 되어갔다. 병원, 막사, 연병장, 조선소, 학교 등에 세워져 육군과 해군 혁명의 중심이 되었다. 경제적 중요성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은 벽돌, 타일, 유리를 러시아 역사상 전례가 없는 규모로 생산하게 만들었다. (…)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표트르 혁명의 체현자로서의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한 것은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새로운 문화적 수도로서의 기능이었다. 여기서 ‘문화적’이란 단순히 건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각예술, 문학, 과학, 교육, 연극, 음악, 예절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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