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한국형 갱스터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조폭영화들은 한국 사회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또는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조폭영화 신드롬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되었던 <친구>에서 준석은 조폭 두목의 아들이기에, 동수는 장의사의 아들이기에 개인적인 숙명에 이끌려 조폭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묘사된다(이상하게도 그들이 폭력 조직에 들어가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이 영화는 연대기르 ㄹ빙자하여 생략을 다소 비논리적으로 사용한다). 시험 못 봤다고 학생 따귀를 때리고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고 주먹질을 하는 선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학교 때문에 조폭이 된 것 같지는 않다. 한 인물의 운명을 전적으로 개인의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멜로드라마적인 해결 방식이다. 멜로드라마에서는 인물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의원인을 개인 또는 그가 속한 가족에서 찾아내고 해결하며, 사회적인 원인은 부차적인 요소로 축소된다.
준석과 동수는 각각 다른 조직의 일원으로 들어가고, 친구에서 적으로 변신한다. 조직 간의 세력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그들은 싸움의 대리자가 되어 서로 죽이려고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심각한 표정으로 '조오련과 바다거북의 수영 시합'을 궁그해하던 순진한 초등학생들이 이제 어른이 되어서 현실의 논리에 뛰어들어 서로 잡아먹기 위해 둘도 없는 친구의 피를 손에 묻히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객은 그들이 똑같이 타락한 나쁜 놈이라고 생가갛기보다는 둘 중에서 누가 더 나은 놈인지 가려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준석이 동수를 청부 살인했다는 명백한 암시들이 널려 있음에도, 이상하게 동수의 아버지처럼 '준석이는 동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믿으려 했다(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인터넷 사이트에는 그 믿음을 영화적으로 증명하려는 수많은 의견들이 올라왔었다).
관객들은 항상 친구를 위해 자기르 희생해온 준석을 나쁜놈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동수를 장의사 아들이라고 놀리는 중학생을 패준 애가 다름 아닌 준석이었다. 동수는 이 일이 있은 뒤 준석을 따라다니게 된다. 준석은 칼로 자신의 몸을 자해함으로써 스스로 체포되었고, 동수의 살인 청부 혐의를 부인하면 석발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쪽 팔릴까봐' 죄를 인정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두드러지게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상택을 동수보다는 준석과 더 가까운 사이로 묘사하는 것과 더불어, 암암리에 준석에게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편들기에는 기묘한 실재의 찡그림이 있다. 준석이 행하는 영웅적 희생의 모습은 대부분 모범생 상택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희생은 모범생의 승인을 끌어내고, 그를 공범자의 자리에 끌어들인다. 이것은 폭력의 감염이며, 폭력의 위협을 숨기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사실상 준석이다.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한다. 그는 원하는 것을 항상 손에 넣으며, 마음만 먹으면 어떤 위기도 극복한다. 바로 그 준석이 상택의 편을 들면서 “우리는 친구 아이가” 라고 할 때 폭력은 더 이상 두려운 대상이 아니다.
상택은 폭력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폭력의 자장에서 가장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모범생 상택이 폭력의 보호아래 자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부러워하는 사회는 이미 폭력에 감염되고 도덕이 마비된 사회일 것이다.
--- pp.150~153
<쉬리>는 한국 최초의 국민차인 '포니'를 보면서 '이만하면 탈 만한데' 하고 외쳤을 감격 어린 목소리를 다시 불러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쉬리>를 보는 행위가 경제 위기의 타개책으로 벌어졌던 '금 모으기 운동'과 닮았다는 것이다. 금붙이를 내놓는 것이 나라 사랑의 잣대가 되었듯 한국 영화 한편을 보는 것이 곧 애국이 됐다. <쉬리> 대 <타이타닉>의 흥행 경쟁은 한국 대 미국 또는 한국 대 외세의 대리전이 되었고, 사람들은 마치 전쟁을 치르듯 영화를 봤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은 <타이타닉>보다 더 흥행을 해도 될 만한 작품이다. 그만큼 많이 봐주자는 것이다. 고군분투한 <쉬리>를 위해……”, “우리의 영화가 다른 나라에서도 흥행 1위가 되는 날까지 우리는 우리의 영화를 비판하고 또 칭찬해야 할 것이다”, “<쉬리>는 불과 <타이타닉>의 2분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다…… 문화 선진국 프랑스, 일본도 할리우드의 폭격에 풍전등화의 현실에 놓여 있으나 IMF를 맞은 한국만이 유일하게 할리우드와 맞서 이겨나가고 있다…… 한국 사회 어느 분야에서 <쉬리>처럼 백 배 이상 큰 세력과 싸워 이긴집단이 있는지…… 작은 세력이 큰 세력을 이긴 경우는 있어도 <쉬리>처럼 백배 이상 큰 세력과 싸워 이긴 집단은 없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 이 말을 나는 '쉬리 열풍'을 통해 실제로 그럴 수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극장문을 나설 때 느꼈던 뿌듯한 마음을 '쉬리 기사'를 접할 때마다 느끼곤 한다……”. <쉬리>를 다룬 신문의 기사 제목은 돌풍, 격침, 침몰, 강타 같은 원색적이고 호전적인 말들로 뒤덮였다. “<쉬리> 돌풍 <타이타닉>도 깬다” , “쉬리 돌풍에 오스카도 흔들” , “작은 물고기 영화 <쉬리> 타이타닉호 격침” , “<쉬리>가 <타이타닉> 침몰시켰다” , “할리우드의 심장 겨눴다” , “쉬리, 미국도 강타할까?”
초호화 여객선의 침몰에서 펼쳐지는 귀족계급의 몰락, 19세기 낭만주의의 붕괴라는 <타이타닉>의 테마는 증발하고, 모든 것이 흥행 수치로 환원되어 <쉬리>와 <타이타닉>이 서로 맞섰다(사실 두 영화는 돈의 수치 오ㅔ에는 비교할 만한 어떤 대상이나 근거도 없다). <타이타닉>을 흥행에서 침몰시키는 것이 민족의 운명을 뒤흔드는 외세에게 복수하는 것이라는 상징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쉬리>의 흥행 성공은 영화 바깥에서 활약한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선동에 크게 힘입었다.
신문과 방송, 그리고 영화 잡지들은 마치 올림픽 경기라도 중계하는 양 매주 흥행 기록을 알렸고, <쉬리>는 자신도 모르게 국민영화가 되었다. 그러나 <쉬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닮았다는 아이러니, 국민영화가 되기 위해 물리쳐야 할 할리우드 영화를 닮아가는 이 아이러니가 사실은 비극의 시작임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할리우드를 공격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할리우드 영화같이 우리도 해냈다는 자신감이 국민영화와 블록버스터로, 야누스의 가면을 쓰고 유령처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어를 모국어로 만들고 싶어 하는 분위기에서 자막 없이 직접 들을 수 있는 자국(할리우드) 영화를 보고싶어 하는 아이러니한 욕망 같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영화의 판타지에 리얼리티가 보족하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관객은 거의 없었고, 다만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찬사와 열광이 줄을 이었다. 국민들이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은 애국적이며 민족적인 행위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동안, 한국 영화계는 할리우드를 닮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 pp.18~20
<쉬리>는 한국 최초의 국민차인 '포니'를 보면서 '이만하면 탈 만한데' 하고 외쳤을 감격 어린 목소리를 다시 불러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쉬리>를 보는 행위가 경제 위기의 타개책으로 벌어졌던 '금 모으기 운동'과 닮았다는 것이다. 금붙이를 내놓는 것이 나라 사랑의 잣대가 되었듯 한국 영화 한편을 보는 것이 곧 애국이 됐다. <쉬리> 대 <타이타닉>의 흥행 경쟁은 한국 대 미국 또는 한국 대 외세의 대리전이 되었고, 사람들은 마치 전쟁을 치르듯 영화를 봤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은 <타이타닉>보다 더 흥행을 해도 될 만한 작품이다. 그만큼 많이 봐주자는 것이다. 고군분투한 <쉬리>를 위해……”, “우리의 영화가 다른 나라에서도 흥행 1위가 되는 날까지 우리는 우리의 영화를 비판하고 또 칭찬해야 할 것이다”, “<쉬리>는 불과 <타이타닉>의 2분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다…… 문화 선진국 프랑스, 일본도 할리우드의 폭격에 풍전등화의 현실에 놓여 있으나 IMF를 맞은 한국만이 유일하게 할리우드와 맞서 이겨나가고 있다…… 한국 사회 어느 분야에서 <쉬리>처럼 백 배 이상 큰 세력과 싸워 이긴집단이 있는지…… 작은 세력이 큰 세력을 이긴 경우는 있어도 <쉬리>처럼 백배 이상 큰 세력과 싸워 이긴 집단은 없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 이 말을 나는 '쉬리 열풍'을 통해 실제로 그럴 수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극장문을 나설 때 느꼈던 뿌듯한 마음을 '쉬리 기사'를 접할 때마다 느끼곤 한다……”. <쉬리>를 다룬 신문의 기사 제목은 돌풍, 격침, 침몰, 강타 같은 원색적이고 호전적인 말들로 뒤덮였다. “<쉬리> 돌풍 <타이타닉>도 깬다” , “쉬리 돌풍에 오스카도 흔들” , “작은 물고기 영화 <쉬리> 타이타닉호 격침” , “<쉬리>가 <타이타닉> 침몰시켰다” , “할리우드의 심장 겨눴다” , “쉬리, 미국도 강타할까?”
초호화 여객선의 침몰에서 펼쳐지는 귀족계급의 몰락, 19세기 낭만주의의 붕괴라는 <타이타닉>의 테마는 증발하고, 모든 것이 흥행 수치로 환원되어 <쉬리>와 <타이타닉>이 서로 맞섰다(사실 두 영화는 돈의 수치 오ㅔ에는 비교할 만한 어떤 대상이나 근거도 없다). <타이타닉>을 흥행에서 침몰시키는 것이 민족의 운명을 뒤흔드는 외세에게 복수하는 것이라는 상징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쉬리>의 흥행 성공은 영화 바깥에서 활약한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선동에 크게 힘입었다.
신문과 방송, 그리고 영화 잡지들은 마치 올림픽 경기라도 중계하는 양 매주 흥행 기록을 알렸고, <쉬리>는 자신도 모르게 국민영화가 되었다. 그러나 <쉬리>가 할리우드 영화를 닮았다는 아이러니, 국민영화가 되기 위해 물리쳐야 할 할리우드 영화를 닮아가는 이 아이러니가 사실은 비극의 시작임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할리우드를 공격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할리우드 영화같이 우리도 해냈다는 자신감이 국민영화와 블록버스터로, 야누스의 가면을 쓰고 유령처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어를 모국어로 만들고 싶어 하는 분위기에서 자막 없이 직접 들을 수 있는 자국(할리우드) 영화를 보고싶어 하는 아이러니한 욕망 같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영화의 판타지에 리얼리티가 보족하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관객은 거의 없었고, 다만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찬사와 열광이 줄을 이었다. 국민들이 한국 영화를 보는 것은 애국적이며 민족적인 행위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동안, 한국 영화계는 할리우드를 닮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 pp.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