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시와 더불어 그리스 문학의 또 다른 맥을 이루었던 희곡은 종교 의식에서, 특히 디오뉘소스를 섬기는 예식에서 연유한 것으로 믿어진다. 연극에서 자주 사용되는 가면은 인간이 신의 행세를 한다거나 마술사가 자신이 지니지 못한 힘을 지녔다는 시늉을 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영어로는 박커스라고 표기하며 로마 신화에서 박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디오뉘소스는 포도를 위시한 식물과 소와 염소 같은 동물들의 성장에서 나타나는 자연의 힘을 상징했으며, 『에우리피데스의 박카이』에서 잘 묘사되었듯이, 숭배자의 혼을 빼앗아 미쳐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 무당에게 신이 내리는 과정과 같은 상황이지만, 더 쉽게 표현하면 술에 취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항상 멀리서 고고한 자세를 취하는 다른 신들과는 달리 디오뉘소스는 이렇게 인간과 한몸이 되어서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삶의 괴로움을 잊게 해주었다. 그러니까 쉽게 상상이 가겠지만, 디오뉘소스를 모시는 예식은 시끄럽고 요란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 도시인들은 오랫동안 디오뉘소스 예식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디오뉘소스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다.
그리고 비극이 전성기에 이른 것은 아테네에서 열리던 디오뉘소스 대축제에서였다. 축제에서는 50명의 코러스가 춤을 곁들여 디오뉘소스 송가에 이어서 비극이 공연되었고, 디오뉘소스를 섬기고 술과 여자를 몹시 좋아하는 반인반수 목신 사튀로스를 위한 목신극, 그런 다음에는 희극이 차례로 공연되었다. 그러니까 디오뉘소스 대축제는 일종의 연극 경연 대화 같은 성격을 띠었었다.
그리스 희곡을 소재로 삼은 영화들 가운데 헐리우드 키드 세대의 기억에 가장 생생하게 남은 작품이라면 아마도『죽어도 좋아』일 것이다. 1962년 미국, ㅍ 랑스, 그리스 합작으로, 줄스 닷신 감독이 그의 아내 멜리나 메르꾸리를 주연시켜 만든 이 영화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히폴뤼투스』를 마르가리타 리베라키가 현대식으로 신화를 풀이하여 각색한 것이며, 같은 해 야엘 로탄이 영화 소설로 발표했고, 우리나라에서도 1981년에 번역되었다.
히폴뤼투스는 포세이돈의 자식이며 아테네의 왕인 테세우스와 아마존 여인인 히폴뤼타의 아들이고 페트라는 그의 계모이다. 히폴뤼투스와 페드라는 아프로디테(로마명 베누스, 영어명 비너스)의 계략에 빠져 근친상간이라는 불륜 관계의 굴레를 쓰고 비극을 맞는다. 페드라는 히폴뤼투스에 대해서 욕정을 품지만 차마 말을 못해서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그런데 테세우스가 없는 사이에 그녀의 유모 오이노네가 히롤뤼투스에게 페드라으 속마음을 전한다. 히폴뤼투스는 심히 역겹다는 반응을 보이고, 벌써부터 자살을염두에 두었던 페드라는 자신의 휼륭한 이름을 더럽히고 자식들의 장래를 망쳐놓을까봐 두려워서 히폴뤼투스가 그녀를 강간하려 했다는 편지를 남기고 목을 매 자살한다.
--- pp.45~47
『바다의 정복자』에서 지미 보이는 처음 만난 전임 총독의 딸에게 “국왕 폐하를 위해 스페인(에스파냐) 잔당을 죽이며 더러운 일을 하는 해적이요” 라고 당당하게 자기 소개를 하는가 하며, 해적영화 분야에서 고전으로 꼽히는『진홍의 도적』에서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해적 선장 발로가 아예 극장 안의 관객을 향해 이렇게 큰소리를 친다.
“이리들 모이시오, 신사숙녀 여러분, 이리들 모여. 여러분은 까마득한 옛날(18세기) 진홍의 도적에게 납치되어 마지막 항해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해적의 나라 해적의 바다에서 해적에 관해 아무 질문도 하지 말고,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면 됩니다. (잠시 후에) 그래도 믿기 어려우면,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절반만 믿으십시오.”
곡마단에서 함께 일했던 버트 랭카스터와 니크 크라바트가 공연하며 『쾌걸 다르도』에서처럼 온갖 곡예 솜씨를 보이는 영화답게, 이런 식으로 시작도니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무계한 즐거움을 한없이 베푼다. 역병이 휩쓸고 간 유령선으로 위장하여 영국 해군의 전함을 포획하고, 전함에 실린 무기를 노획하여 반란군에게 팔아넘기고, 돈을 더 준다면 반란 세력이 아니라 당국에 무기를 되팔겠다고 나서기도 하는가 하면, 반역죄로 투옥된 엘 리브레를 구출해 주고 돈을 받은 다음 다시 그를 당국에 팔아넘겨 또 돈을 벌겠다는 등 도둑답게 화려한 야망을 펼치던 해적이, 혁명가 엘 리브레의 딸에게 반해서 민중 봉기에 합세한다는, 빤하디빤한 판박이 내용이지만, “배에 태운 여자를 고스란히 내버려 둔다는 것은 해적의 법도에 어긋난다” 는 식의 장난스러운 논리, 귀족으로 변장하고 적지로 침투하여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핌퍼넬' 식 상황, 종횡무진 군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벌이는 통쾌무비 난장판 결투, 선상반란이라는 뒤집기 양념, 거기에다 미래의 개틀링 기관총에 잠수함과 비행선은 물론이요 007식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민중의 '동학란'은 헐리우드 키드 세대를 열광시키고도 남았다. 진홍은 황제의 빛깔이어서, 으뜸 도둑은 그렇다고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해적들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해적영화는 뭐니머니 해도 로빈 후드의 전통을 이어받은 “무범자의 자유분방한 삶” 이라는 환상과 착각으로 관객을 모은다. 자유분방한 듯싶으면서도 항상 위험이 뒤따르는 불확실성의 모험이 낭만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바다의 정복자』 마지막 장면에서 지미 보이의 심복과 헨리 모건이 낙조가 아름다운 바다를 둘러보며 나누는 대화가 그런 해석의 대표적인 예이다.
“거추장스러운 예복에 가발을 쓰고 살아야 하는 자마이카에는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저 바다 얼마나 넓고 시원스러운가요. 온세상의 보물도 마음만 먹으면 모두 내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영화에서 재현된 해적은『황금배』에서 산타 로자가 상상했던 헨리모건처럼 용감하고 멋진 사나이여서, 형틀에 묶여 고문을 당하면서도 호탕하게 웃어 가며 농담을 계속하고, 현대적인 시각으로는 해적질이 정의인지 어쩐지 의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영화 속의 해적이라면 의사였다가 마지못해 해적이 된 피터 블러드, 그리고 무성영화에서도 이미 귀족이었다가 불한당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해적이 된 『검은 해적』 그리고 18세기에 해적이 된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프릿츠 랑의 『월야의 함대』에서처럼 대부분 선량한 인물이었다가 과거에 무슨 모함을 받았던가 해서 억지로 악인이 되었다는 설정이 보통이고, 따라서 최후의 승리를 해준 주인공이 거둔다는 수순을 밟는다.
--- pp.123~126
『바다의 정복자』에서 지미 보이는 처음 만난 전임 총독의 딸에게 “국왕 폐하를 위해 스페인(에스파냐) 잔당을 죽이며 더러운 일을 하는 해적이요” 라고 당당하게 자기 소개를 하는가 하며, 해적영화 분야에서 고전으로 꼽히는『진홍의 도적』에서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해적 선장 발로가 아예 극장 안의 관객을 향해 이렇게 큰소리를 친다.
“이리들 모이시오, 신사숙녀 여러분, 이리들 모여. 여러분은 까마득한 옛날(18세기) 진홍의 도적에게 납치되어 마지막 항해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해적의 나라 해적의 바다에서 해적에 관해 아무 질문도 하지 말고,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면 됩니다. (잠시 후에) 그래도 믿기 어려우면,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절반만 믿으십시오.”
곡마단에서 함께 일했던 버트 랭카스터와 니크 크라바트가 공연하며 『쾌걸 다르도』에서처럼 온갖 곡예 솜씨를 보이는 영화답게, 이런 식으로 시작도니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무계한 즐거움을 한없이 베푼다. 역병이 휩쓸고 간 유령선으로 위장하여 영국 해군의 전함을 포획하고, 전함에 실린 무기를 노획하여 반란군에게 팔아넘기고, 돈을 더 준다면 반란 세력이 아니라 당국에 무기를 되팔겠다고 나서기도 하는가 하면, 반역죄로 투옥된 엘 리브레를 구출해 주고 돈을 받은 다음 다시 그를 당국에 팔아넘겨 또 돈을 벌겠다는 등 도둑답게 화려한 야망을 펼치던 해적이, 혁명가 엘 리브레의 딸에게 반해서 민중 봉기에 합세한다는, 빤하디빤한 판박이 내용이지만, “배에 태운 여자를 고스란히 내버려 둔다는 것은 해적의 법도에 어긋난다” 는 식의 장난스러운 논리, 귀족으로 변장하고 적지로 침투하여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핌퍼넬' 식 상황, 종횡무진 군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벌이는 통쾌무비 난장판 결투, 선상반란이라는 뒤집기 양념, 거기에다 미래의 개틀링 기관총에 잠수함과 비행선은 물론이요 007식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민중의 '동학란'은 헐리우드 키드 세대를 열광시키고도 남았다. 진홍은 황제의 빛깔이어서, 으뜸 도둑은 그렇다고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해적들도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해적영화는 뭐니머니 해도 로빈 후드의 전통을 이어받은 “무범자의 자유분방한 삶” 이라는 환상과 착각으로 관객을 모은다. 자유분방한 듯싶으면서도 항상 위험이 뒤따르는 불확실성의 모험이 낭만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바다의 정복자』 마지막 장면에서 지미 보이의 심복과 헨리 모건이 낙조가 아름다운 바다를 둘러보며 나누는 대화가 그런 해석의 대표적인 예이다.
“거추장스러운 예복에 가발을 쓰고 살아야 하는 자마이카에는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저 바다 얼마나 넓고 시원스러운가요. 온세상의 보물도 마음만 먹으면 모두 내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영화에서 재현된 해적은『황금배』에서 산타 로자가 상상했던 헨리모건처럼 용감하고 멋진 사나이여서, 형틀에 묶여 고문을 당하면서도 호탕하게 웃어 가며 농담을 계속하고, 현대적인 시각으로는 해적질이 정의인지 어쩐지 의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영화 속의 해적이라면 의사였다가 마지못해 해적이 된 피터 블러드, 그리고 무성영화에서도 이미 귀족이었다가 불한당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해적이 된 『검은 해적』 그리고 18세기에 해적이 된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프릿츠 랑의 『월야의 함대』에서처럼 대부분 선량한 인물이었다가 과거에 무슨 모함을 받았던가 해서 억지로 악인이 되었다는 설정이 보통이고, 따라서 최후의 승리를 해준 주인공이 거둔다는 수순을 밟는다.
--- pp.123~126